나는 주최 측이 공개를 예고한 시간보다 발굴현장에는 일찍 가는 버릇이 있다. 대략 한 시간 정도 먼저 간다. 그래야 느긋하게 이것저것 제대로 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혼자서 현장을 빙 둘러 보고, 출토 유물도 대강 훑어본다. 그러고서 느긋하게 조사원들이나 조사 책임자들한테 궁금한 사항을 물어보곤 한다.
또 이렇게 일찍 가야 이런저런 다른 정보까지 얻을 일이 많다. 발굴현장도 엄연히 인적 교유의 장이라는 사실을 나는 잊지 않으려 했다.
현장에서는 취재 수첩을 꺼내지 않는다. 인터뷰 대상자가 아무리 관록이 있다 해도, 취재 수첩 꺼내들고 메모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긴장하거나 소위 ‘접대용 멘트’를 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 내 말이 잘못 전달되지 않을까, 이 말을 하면 여파는 없을까 하는 각종 경계로 저쪽에서 무장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되도록 나는 적어도 발굴현장에서는 메모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으며, 거의 농담만 주고받았다. 하지만 그 농담들 속에는 내가 듣고자 하는 질문이 다 들어있다.
적어도 나는 그런 식으로 취재했다. 내 방식이 정답이라고는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내 스타일은 그러했다고 덧붙여 두고자 한다.
이날도 현장에는 일찍 도착했다고 기억한다. 아마 그 전날 자동차로 창녕으로 내려가 창녕읍 어느 모텔에서 잤다고 기억한다. 터파기를 마치고 콘크리트 벽체가 올라서기 시작한 문제의 양·배수장이 있고, 그 전면이 발굴현장이었다. 발굴 현장은 말끔히 청소 중이었다.
외부로 공개되는 날이니, 발굴 현장 역시 분을 바르고 연지곤지 찍어야 했던 것이다. 조금은 황량한 발굴현장을 벙거지 모자를 쓴 중년 남자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상념에 잠긴 듯도 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임학종 실장이었다. 고 이상길 교수가 나와 동행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발굴현장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날 발굴현장을 둘러보고는 나는 다음과 같은 기사(생략)를 창녕발로 송고했다.
2005년 6월의 창녕 비봉리 현장. 이때가 임학종 전성시대였고 핏대 이상길의 전성시대기이도 했다.
(2017. 1.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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