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조 梁 왕조 개창주 무제武帝 소연蕭衍은 불심이 무척이나 깊어 육식조차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종묘제사에 필요한 고기조차 채소로 교체했다.
불교의 기본 정신이 보시에 있다고 믿은 그가 공양한 스님 백성이 한둘이 아니다.
이런 그도 적국 동위東魏에서 항복한 장수 후경侯景을 중용했다가 이것이 끝내 빌미가 되어 그가 일으킨 반란에 유폐되어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팔순 고령을 넘긴 양무제는 베저테리언인 까닭에 유폐기간 중 꿀물을 달라했지만, 후경은 이조차 거절했다. 50년을 넘게 재위하면서 남조 왕조의 전성시대를 연 일세의 제왕 양 무제는 이리해서 굶어 죽었다.
후세, 특히 불교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양무제를 끊임없이 조롱했다.
"부처가 그리 좋다더니 그런 부처가 왜 무제를 돕지 않았던가? 무제가 그리 공양한 사람들은 후경의 반란에 위기에 처하자 왜 다들 도망갔는가?"
역사가 그렇더라.
(2015.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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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무제는 불교를 배척해야 한다는 논리에 충실한 사람들한테는 배불排佛 억불抑佛 혹은 척불斥佛의 타당성을 증명하는 일대 도구로 끊임없이 변주되었다. 그럴 때면 언제나 그는 호명되어 조롱당하곤 했다.
그것은 어쩌면 불교의 자업자득이기도 했다. 부처를 믿으면 국난까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의 강요가 빚은 마찰음이었다.
부적을 몸에 지니면 총칼도 비켜간다는 그런 허망한 신념에 실제 구한말에 무수한 군인이 죽어갔단 말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다. 불심이 아무리 돈독한들 그에서 감화해서 적국 장수를 용서하고 중용하는 일로까지 발전했는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의 반란을 제어하지도 못했고 그것이 또 사직과 그의 목숨을 구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새로운 시대를 제창하며 출현한 대승불교의 민낯을 만천하에 폭로한 사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양 무제는 불교에서도 새로운 성찰을 요구하는 일대 사건이었다.
이런 공격에 불교가 곤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불교는 저 양 무제를 어찌했을까?
이것 역시 깊은 고찰을 요구하거니와 그의 불교신앙이 지니는 문제를 지적함으로써 그의 일탈로 끌어가는 방식이 있었으니 이에 대해선 다른 자리를 마련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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