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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백제의 신적강하臣籍降下와 창씨創氏

by 초야잠필 2023. 12.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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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에는 잘 알다시피 신적강하라는 것이 있는데, 

우리 역사에도 당연히 비슷한 것은 있다. 

조선시대 왕자들이 당대에는 대군大君이다가 그 다음에는 군君, 다음에는 더이상 봉군하지 않고 일반 사대부와 같이 대우한다던가. 

일본의 신적강하는 헤이안시대 이후 사성賜姓하는 경우가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세이와덴노清和天皇에서 갈려나오면서 신적강하 되어 사성 받은 세이와겐지清和源氏와 

간무덴노桓武天皇에서 갈려나와 사성받은 간무헤이시桓武平氏가 있다. 

이 두 집안은 겐페이 합전源平合戦(1180~1185) 당시 인상이 워낙 강렬한 탓에 모두 무사집안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아니었고 일부는 그대로 공가公家로 남아 귀족으로 잔존한 집안도 있었고 

또 알려진 것처럼 무사가 되어 번성한 집안도 있었다. 

이처럼 황적에서 이탈하면서 새로운 성을 받아 나오는 일본의 관습은 언제 생긴 것일까? 

기록상으로는 헤이안 율령시대 이전으로는 거슬러 올라가지 않는다. 

반면 왕가에서 갈려 나오면서 새로운 성을 창씨한 전통이 보이는 곳은 오히려 백제다. 

백제는 부여씨에서 갈려 나온 것이 분명한 성들이 꽤 보이는데, 

흑치씨, 귀실씨 등은 확실히 부여씨에서 갈려 나온 성이고, 

고이씨, 동성씨 등도 어쩌면 부여씨에서 갈려 나온 성이라는 의견이 있는 모양이다. 

적어도 백제 후기에는 왕가에서 멀어지면서 새로운 성을 창씨하는 경우가 확실히 있었던 것 같고, 

이러한 전통의 한 흐름이 일본에서 신적강하씨 사성으로 연결된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고구려에서 백제가 갈려 나올 때도 

원래 같은 성 (고씨)였다가 부여씨로 나온 것일 테니

이것도 일종의 창씨라면 창씨였겠다. 

일본서기에 보면 백제 부여창이 왕자이던 시절에 고구려 측 장수와 나노리名乗り를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때마침 날이 밝자 목에 경개頸鎧를 입은 자 1騎, 징을 꼽은 자鐃자는 자세하지 않다 2騎, 표범 꼬리를 끼운 자 2騎 모두 합해 5騎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묻기를 “어린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맞이하는 예를 행하지 않는가.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미리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餘昌이 “姓은 (高麗 왕실과) 同姓이고 관위는 杆率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百濟 편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의 법식대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부여창은 자신의 성이 고구려 왕실과 동성이라고 했던 것을 보면, 어쩌면 부여씨를 성이 아니라 씨로 인식했을 수도 있겠다. 

이렇게 본다면 귀실씨鬼室氏나 흑치씨黑齒氏는 

고씨에서 부여씨로, 그리고 다시 귀실씨나 흑치씨로 창씨 한  셈인데, 

일본에서도 헤이케나 겐지씨의 후손들이 다시 창씨하여 또 갈려 나가는 경우가 많으니, 

이것도 백제가 기원이었다면 기원이라 하겠다. 

겐페이합전도. 일본에서 무가정권은 겐페이의 후예가 아니면 명함을 내기 힘들엇다. 따라서 수많은 씨족들이 겐페이의 후손을 자칭했는데 그 안에는 엉터리들도 많았을 것이다.

 
***
 
신적강하臣籍降下란 글자 그대로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황족이 신하의 자리로 떨어지는 경우가 있고, 또 신하의 자리에서 떨어진 신하가 자체로 그에서도 계단이 더 떨어지는 경우다. 보통은 전자를 말한다. 

신적강하가 일어나는 이유는 간단해서 왕위계승권 때문이다. 왕위 계승권은 그 대상자를 엄밀히 제한해야 한다. 누구나 왕의 피를 받았다고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면 그 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하다. 그래서 그 자격을 엄밀히 제한하며, 이를 위해 계발한 제대로 바로 신적강하다. 

조선왕조에서는 원칙으로 왕의 적통 아들인 왕자밖에 왕위계승권이 없다. 왕의 자식이라 해도 후궁 소생은 대군이 아니라 그냥 君이라 해서 왕위계승권을 박탈했다. 왕위는 원칙으로는 대군밖에 못간다.

이 대군도 문제가 있어, 1대에 한해 그 지위를 물려받고, 그 대군이 낳은 자식들은 그냥 君이 되어 버린다. 

한데 이렇게 되면 여러 문제가 생긴다. 

첫째 왕이 정궁한테서 아들을 낳을 가능성이 무척이나 낮다. 아들? 못 낳는 아비가 수두룩했다. 이 경우 후궁 소생 중에서 적당한 이를 고르는데, 말이 적당이지 가능키나 할 법인가? 박터치는 내전이 벌어진다.

이 내전에는 왕의 동부동모 형제들도 끼어든다. 왜? 대군이기 때문에 당연히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가 있다. 

저 신적강하를 신라시대에는 족강族降이라 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안 보이지만 화랑세기에 등장했다. 성골에서 진골로, 진골에서 육두품으로 떨어지는 따위를 족강이라 했다.

신적강하가 있다면 당연히 그 반대도 있어야 한다. 이 반대에 대해서는 거의 연구가 없다. 어떻게 역사가 떨어지기만 한단 말인가? 

고대 일본의 창씨를 보면 저자 말마따나 백제와의 영향관계가 굉장히 짙은데, 이것이 꼭 백제-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라 광범위한 동아시아 보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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