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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백제 왕가의 공동묘지 판대기 덮개돌 항아리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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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릉원서 돌 얹은 토기 2점 발견…"장례문화 연구 단서"
4호분 '서상총' 발굴조사…"토기 내부 유기물 분석 진행"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백제 사비도읍기(538∼660) 왕릉급 무덤이 모여 있는 충남 부여 왕릉원의 한 고분 입구에서 편평한 깬 돌을 뚜껑처럼 얹은 토기 2점이 나왔다.

이 같은 토기 매납 형태는 백제 고분에서 처음 확인된 사례로, 백제 장례문화와 제의 과정을 연구하는 데 도움이 될 중요한 단서로 평가된다.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지난해 부여 왕릉원 4호분 '서상총'(西上塚) 발굴조사를 통해 묘도(墓道·무덤 입구에서 시신을 두는 방에 이르는 길) 바닥 양쪽에서 돌을 위쪽에 덮고 똑바로 세운 토기를 각각 발견했다고 23일 밝혔다.

부여 왕릉원서 돌 얹은 토기 2점 발견…"장례문화 연구 단서"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 백제 사비도읍기(538∼660) 왕릉급 무덤이 모여 있는 충남 부여 왕릉원의 한 고분 입구에서 편평한 깬 돌을 뚜껑처럼 얹은 토기 2점이 나왔다.이 같은 토기 매납 형

k-odyssey.com


이전에는 부여 능산리고분군이라 일컫다가 근자에 그 이름도 요상한 충남 부여 왕릉원 이라 해서 명패를 바꿔 단 데는 현재까지 그곳에서 확인된 그 어떤 무덤도 주인이 드러나지 아니했지만 백제가 사비, 곧 지금의 부여에 도읍한 시기(526~660)에 형성된 왕가의 공동묘지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 이유를 예서 다시 장황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듯하고



능산리 백제왕릉 묘역 부덤은 이런 식으로 구별한다. 아랫줄 가운데는 저에 의하면 중하총中下塚이라 불러주면 된다. 동쪽 끄터머리 위쪽은 동상총東上塚이라 부르겠지? 



아무튼 현재 드러난 묘역을 보면 양지 바른 산록에다가 대략 앞뒤 두 줄로 3개씩, 모두 6기에 이르는 백제시대 무덤이 있으니, 그것이 위치한 모양새가 동서 방향으로 배치되면서 남쪽을 향하고 있어 식민지시대에 이들 무덤을 보고하면서 조선총독부에서 동하총東下塚이며 서상총西上塚이니 하는 이름을 붙였더랬다.

동하총이란 동쪽에 위치하며 아랫열에 위치한다는 뜻이며, 서상총이란 서쪽에 위치하며 윗열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앞 그림 참조)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에서 이 묘역을 근자 다시 팠다. 파 봐야 별로 나올 것도 없었다. 식민지시대에 모조리 확 까서 내부를 들여다 봤고, 유물은 다 끄집어 냈으며, 그에 대한 보고 또한 지금 기준으로는 좀 부족하기는 하지만 구조 역시 다 드러난 마당이다.

이 경우 무덤을 새로 파는 이유는 간단하다. 니들이 팠는데 우리도 파야겠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긴 뭐 언제까지나 일본넘들이 100년 전에 기록한 토대로 연구를 진행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런 재조사의 경우 흔히 새로운 발굴성과는 일본넘들이 놓친 주변에서 나오기 마련이라, 그때는 고고학 지식도 일천했고, 더구나 무덤 중심부를 치고 들어가는 데 혈안이 된 때라, 상대적으로 봉분이라든가 그로 통하는 무덤길 주변 조사는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연구소가 저들 6곳 중에서도 서상총西上塚, 그러니깐 윗열 맨 서쪽 지점(앞 내 위대한 그림 참조)을 팠더니만, 아니나 다를까 무덤 밖에서 무덤방으로 통하는 길 바닥 양쪽에서 무엇인가를 파묻은 흔적이 발견되었거니와 바로 아래 사진 구멍 뿅뿅 뚫린 양쪽 지점이다.



그래 이걸 팠더니 여기서 요런 것들이 납시셨단다.



돌판대기를 뚜껑으로 썼는데, 그걸 해체하면 아래와 같다.


뚜껑을 덮었다는 건 안에다가 뭔가를 넣어 보호막으로 썼다는 증거이니, 그 안에서 무엇인가 나올 가능성이 있겠다. 다만 나는 특별한 증거가 있는 건 아니나 별로 얻을 것이 없지 않을까 싶은 막연한 느낌이 있다. 천상 생긴 모양새는 태항아리다. 혹 모르지 않겠는가? 어딘가 묻어두었던 태를 저들 아마도 부부였을 사람을 나중에 매장하면서 옮겨다 놨는지?

저것이 발견된 지점은 이승과 저승의 경계 지점이라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 무덤으로 가는 길목에다가 설치했다. 저건 동시대 불교로 보건대 사천왕상 혹은 금강역사가 들어서는 지점이다. 혹 무덤 수호 의미가 있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러기에는 그 상징성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다.

그보다는 무령왕릉 같은 출토 사례로 비춰 보건대 죽은 이를 위한 상차림 정도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이 경우도 상차림 같은 흔적이 좋은데 저런 식으로 찬합 형식으로 만든 점이 영 걸린다.

무덤을 파제낀 모습은 아래와 같다.


보다시피 각을 아주 잘 맞춘 박스형 무덤이다. 무덤방은 전면에서 바라보면 단면 사각형. 정사각형에 가까운 직사각형이다. 저짝에다가 이 앞짝에서 관을 밀어넣었다.

동시대 신라 무덤과 비교할 적에 백제는 봉분에 신경쓰지 않았다. 있는둥 마는둥 했으니, 다만 그 위치가 산록이라, 그 자체가 산릉山陵이었다. 이 점이 졸라 봉분을 크게 만든 신라와는 뚜렷이 구별한다.

이 무렵이면 신라 역시 경주 평야를 떠나 산록 같은 데다가 무덤을 쓰기도 하지만, 평지에서 졸라 큰 무덤을 만들던 습습을 못내 버리지 못하고 돈 열라 들어가는 그런 대따시형 무덤을 만들었다.

이 발굴성과에 대한 부여문화재연구소 자랑문은 다음과 같다.


부여 왕릉원에서 백제 왕실의 장례문화 흔적 확인
- 4호분(서상총) 무덤 입구(묘도)에서 땅 속에 묻힌 토기 2점 최초 확인 -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소장 임승경)는 지난해 9월부터 시행해온 부여 왕릉원 4호분의 발굴조사 결과, 백제 장례문화의 일면을 밝혀줄 수 있는 토기 2점을 새롭게 확인하였다.

부여 왕릉원에는 일제강점기(1915년, 1917년)에 확인된 6기의 고분과 1966년 보수정비공사 과정에서 발견된 1기의 고분이 정비되어 있는데, 당시 고분들의 조사내용이 빈약하고, 사진과 도면자료도 매우 부족한 편이어서 백제 시대 장례문화를 파악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특히, 4호분의 경우에는 도면조차 남아 있지 않고 정비된 봉분의 규모와 위치도 차이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어 가장 먼저 재조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조사 결과, 4호분은 시신을 안치한 현실(玄室), 연도(羨道), 묘도(墓道)로 이루어진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분, 橫穴式石室墳)으로 확인되었다. 또한, 상부구조인 봉분도 비교적 잘 남아 있어서 백제 시대 왕릉 축조방법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확인되었다.
* 현실(玄室): 시신을 안치한 방
* 연도(羨道): 고분의 입구에서 시신을 안치한 방까지 이르는 길
* 묘도(墓道): 무덤의 입구에서부터 시신을 두는 방까지 이르는 길

특히, 4호분 무덤 입구(묘도)의 바닥 양쪽에서는 매납(埋納)시설 2기가 처음 확인되었는데, 매납시설 안에는 토기를 똑바로 세워 넣은 뒤 편평한 판석(쪼갠 돌)을 뚜껑으로 덮은 형태로 확인되었다. 이렇게 묘도 내부에서 토기에 돌을 덮은 시설은 백제 고분에서는 처음 확인된 사례로, 백제 시대 장례문화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주목된다. 특히, 묘도를 축조한 뒤에 다시 묘도 바닥을 파고 토기를 매납한 것으로 보아 당시 제의과정을 복원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될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토기에 담긴 내용물을 밝힌다면, 당시 제의과정을 보다 분명히 보여주는 단서가 될 것으로 판단되어, 현재 국립문화재연구원 보존과학연구실과 함께 토기 내부에 쌓인 흙에 대한 유기물 분석 등을 진행하고 있다.

한편, 올해 3월부터는 3호분(서하총)의 발굴조사를 추진한다. 3호분 역시 4호분과 마찬가지로 현재 정비된 봉분의 규모와 위치가 백제 시대 봉분과 차이가 있음이 확인되어 이에 대한 올바른 정비·복원 안을 마련하고자 추진하게 되었다. 3호분은 작년에 조사되었던 4호분의 남쪽에 가까이 자리하고 있어, 부여 왕릉원 내 고분의 입지와 조영 순서 등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성과가 도출될 것으로 예상된다. 그리고 3호분의 조사를 진행함과 동시에 4호분의 상시 현장공개를 병행하고, 전체 조사과정을 영상으로 제작·공유하여 조사 성과를 국민에게 빠르게 공개할 계획이다.

문화재청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는 고대사 자료가 부족한 상황에서 이번에 확인된 매납시설은 백제 사비기 장례문화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의미가 크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현재까지의 조사내용을 앞으로의 복원·정비에 참고하고자 전 과정을 디지털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현재까지 정비된 봉분의 규모와 위치 등을 제대로 바로잡기 위하여, 최신 조사·연구 성과가 온전히 반영된 왕릉의 정비·복원 안도 마련할 계획이다.

붙임. 사진 자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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