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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범어사본 삼국유사 국보 지정으로 보는 국민을 위한 문화재행정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8.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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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 시기 가장 이른 '삼국유사 범어사본' 국보 됐다 | 연합뉴스

인쇄 시기 가장 이른 '삼국유사 범어사본' 국보 됐다, 강종훈기자, 문화뉴스 (송고시간 2020-08-27 10:20)

www.yna.co.kr

 

삼국사기와 더불어 한국고대사를 증언하는 양대 문헌으로 꼽히는 삼국유사는 관찬官撰이 아닌 까닭에 그 등장에서부터 현재까지 변천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일이 전자에 견주어 지난至難하거니와, 현재 시중에 통용하는 각종 삼국유사는 보통은 조선 중종 7년, 명明 정덕正德 7년, 서기 1512년 경주부윤 이계복李繼福 이름으로 중간했다 해서 이른바 중종임신본中宗壬申本 혹은 정덕본正德本이라 일컫는 중간본重刊本이다.  

 

중간본이란 거듭 인쇄한 판본이라는 뜻이다. 간단히 말하면 copy 본이다. 다만 당시에는 제록스 프린터가 등장하기 전이니, 그것이 인쇄하는데 참고한 이전 판본이 무엇인지도 또 문제가 되거니와 삼국유사는 근본이 사찬私撰이며, 인기도 없었던 까닭에 정덕본 이전에 얼마만치 인쇄 유포가 이뤄졌는지는 종잡기조차 힘들다. 

 

범어사본 삼국유사 권제4 의해義解제5 원광서학圓光西學

 

흔히 삼국유사를 일러 일연 찬술이라 하지만, 이게 간단치는 아니해서 나는 그의 저술로 보지 않는다. 다만 그의 제자 무극無極이라는 스님이 현존하는 삼국유사 특정 편 중 하나를 썼다는 흔적은 삼국유사 자체에 남았으니, 지금 하나 확신할 수 있는 점은 일연 스님이 타계하던 무렵에는 우리가 아는 삼국유사에 등장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정덕본 기준으로 삼국유사는 5책冊 9편篇이다. 전통시대 책은 현재 우리가 말하는 volume라, 낱권을 말한다. 5책이니 현재를 기준으로 따지면 5책이 세트를 이룬다. 편篇이란 요새 개념으로는 챕터 chapter 혹은 장章이다. 앞대가리 왕들의 족보를 정리한 왕력王曆 이래 모두 9개 챕터로 구성되거니와, 이는 주제별 분류를 따른다. 

 

삼국유사가 편찬될 무렵에는 이미 목판인쇄술은 광범위하게 퍼졌으니, 문제는 그것이 언제 첫 간본刊本이 나왔는지는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범어사본 삼국유사 의상전교義湘傳敎

 

전통시대 동아시아 모든 책은 필사본으로 출발한다. 필사筆寫, 붓으로 베껴 썼다는 뜻으로, 저자 자신이 직접 쓴 것이 출발이긴 하겠지만 이것도 복잡해서 애초에 대필을 하기도 한다. 이 경우 필적이 문제가 되겠거니와, 암튼 지가 직접 썼건 대필을 했건, 모든 책은 필사본에서 출발한다. 필사본 중에서도 최종 편집이 이뤄지지 않은 단계 원고를 수고手稿 정도로 표현하기도 하는 듯한데, 보통 이렇게만 원고뭉치를 대강 만들어놓고 본래 저자가 죽어버리는 일이 다대하다. 

 

전통시대 동아시아 책은 의외로 이 필사본 형태로 유전되는 일이 많다. 인쇄가 전연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하겠지만, 그때는 빌려서 베껴 썼다. 책값이 하도 비싸서 그랬고, 무엇보다 그걸 나무 판대기에다가 일일일이 새겨서 먹물 발라 찍고는 그걸 다시 책으로 장정한다고 생각해 봐라. 미치고 환장하는 데서 더 나아가 살림 거덜난다. 금속활자도 마찬가지다. 말처럼 인쇄가 쉽지 않다. 경제가 휘청휘청한다. 

 

파른본(손보기 구 소장본) 삼국유사 왕력편

 

우리가 아는 조선시대 문집으로 조선시대 간행된 것 의외로 매우 드물다. 석인판이 도입된 식민지시대에 와서야 인쇄가 이뤄지는 건 인쇄술 혁명에서 힘입는다. 여유당전서? 그거 내내 필사본으로 유통되다가(뭐 유통이겠어? 집구석에 쳐박혀 있다가 한두 놈 봤을 뿐이다) 식민지시대에 와서야 위당 정인보가 비로소 찍어낸다. 

 

얘기가 옆길로 많이 샜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삼국유사가 고려시대에 인쇄본으로 간행되었는가? 모른다!!!! 간행되었을 거라고 많은 사람이 이야기하는데 난 모르겠다!!! 

 

지금 하나 확실한 것은 고려말 혹은 조선초기 어느 시점에 간행된 것만은 분명하다. 한데 이 경우도 문제가 있어 어느 시점인지 도통 알 수가 없다! 혹자는 피휘避諱라고 해서 고려시대 왕 이름을 다른 글자로 바꿨느냐 아니냐로 따지기도 하는데 이것도 의미없다. 바꾸기도 하고 안바꾸기도 한 곳이 천지기 때문이다. 

 

파른본(손보기 구 소장본) 삼국유사 왕력편

 

전통시대 책은 보통은 요즘 기준으로 하면 전질 세트 개념이라, 이게 골때리는 게 낱권으로 통용하는 일이 빈발하다는 사실이다. 책 부피가 늘어날 수록 낱권 숫자가 그만큼 불어날 수밖에 없고, 이 경우 거질巨이라 분류하는 것들로 현재까지 온전하게 전해지는 것이 드물다. 이런 불완전한 전질 세트를 낙질落帙이라 한다. 이빨이 빠졌다는 뜻이다. 

 

삼국유사는 기껏해야 낱권 5책밖에 되진 않지만, 이게 이산하는 일이 많아 정덕본 이전 간본으로 온전하게 전 세트가 전해지는 일이 없다!!! 씨불!!!!

 

현재까지 알려진 정덕본 이전 고판본으로는 파른 손보기가 소장하다가 연세대박물관에 기증된 1책이 있는데, 이건 왕력편이랑 기이편 전반부다. 이 외데 석남본石南本이라 해서 송석하가 소장하다가 지금은 고려대인가로 가 있는 것이 있고, 송은본松隱本은 곽영대郭永大라는 분이 소장한다. 

 

파른본(손보기 구 소장본) 삼국유사 왕력편

 

이번에 국보 제306-4호가 된 삼국유사는 정덕본 이전 고판본이다. 삼국유사 권4와 5를 묶은 1책인데 부산 범어사 소장본이다. 이게 왜 범어사로 가게 되었는지도 미스터리다. 범어사 초대 주지를 역임한 오성월吳惺月(1865∼1943)이 소장하던 것이라는데 일컫기를 1907년 무렵 범어사에 기증됐다고 전한단다.

 

삼국유사 간행과 관련해 아래 첨부하는 문화재청 보도자료를 보면 다음 세 가지로 정리하고 있으니

 

▲일연스님이 입적入寂하기 전 간행했다는 설

▲1323년(고려 충숙왕 10년)경의 무극無極이 간행했다는 설

▲1394년(태조 3년) 경 경주부사 김거두金居斗가 『삼국사기』를 중간重刊하면서 함께 간행하였다는 설 등이 있음.

 

이라 하면서 덧붙이기를 

 

고려시대 판본은 알려지지 않았고 현존하는 가장 이른 판본은 1394년 경 판각된 조선 초기 판본임

 

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 역시 문제가 적지 않아 1394년에 간행됐다는 직접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씨불!!!!

 

파른본(손보기 구 소장본) 삼국유사 왕력편과 정덕본 비교

 

그러면서 이번 범어사본을 간평하기를

 

현재 같은 계열의 판본으로 알려진 국보 2건(국보 제306호(송은본), 국보 제306-3호(파른본)과 비교할 때 범어사 소장본은 비록 완질完帙은 아니지만 1394년 처음 판각된 후 인출印出 시기가 가장 빠른 자료로서 서지학적 의미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기존 지정본에서 누락된 제28∼30장을 보완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자, 1512년(중종 7년) 간행본의 오탈자를 확인할 수 있어 현재까지 알려진 삼국유사 판본에 대한 교감校勘과 원판原板 복원을 위한 자료로서 역사‧학술적인 중요성이 크다.

 

이라 한다. 덧붙여

 

아울러 범어사 소장본은 서체, 규격, 행간行間 등에 있어 후대인 1512년 간행된 판본과 밀접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다른 지정본과 더불어 조선 초기 판본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이고, 단군신화檀君神話를 비롯해 향찰鄕札(신라식 음운 표기방식)로 쓴 향가鄕歌 14수가 수록되어 있어 우리나라 고대 언어 연구에도 많은 참고가 된다.

이라 한다. 

 

파른본(손보기 구 소장본) 삼국유사 왕력편

 

자칫 제목만 보면 범어사본이 삼국유사 알려진 모든 판본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오해를 살 수도 있거니와, 그것이 아니고 기존 국보에 올라간 고간본과 함께 그런 위치를 지닌다는 뜻으로 봐야 한다.

 

아무튼 이 범어사본을 가미함으로써 정덕본 이전 삼국유사는 온전한 모습을 갖추는 셈이다. 

 

덧붙이건대 나는 매양 우리네 문화재정책이 지정 혹은 해제 편중을 문제삼으면서 그에 시종 일관 불만이거니와, 이런 것들을 지정하면 무엇하는가? 고화질 전면 서비스를 해야 한다. 

 

삼국유사 역시 정덕본은 물론이요, 이번에 보완한 고인쇄본 전체는 낱장 한장한장 고화질 서비스를 하루빨리 구축해서 대국민 서비스를 해야 한다고 본다. 언제까지 문화재위원회가 지정이나 하고 앉았겠는가? 

 

문화재청 관련 부서도 지정 중심에서 하루빨리 탈피해 활용에 정책 방점을 찍어주길 바란다. 

 

보물이건 국보건 관계없다. 보물을 국보로 승격하는 일이 시급한 것은 아니다!!! 

 

 

파른본(손보기 구 소장본) 삼국유사 왕력편

 

현존 가장 이른 간행본,‘삼국유사 권4~5’국보로 승격 지정
등록일 2020-08-27
주관부서 유형문화재과

- 조선 후기 건축그림‘장용영 본형도형 일괄’등 8건은 보물로 신규 지정 -


문화재청(청장 정재숙)은 보물 제419-3호 ‘삼국유사 권4~5’를 국보 제306-4호로 지정하고, ‘장용영 본영 도형 일괄’,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전적’ 3건, ‘공주 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사보살입상 및 복장유물’, ‘공주 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사보살입상 복장전적’ 등 총 8건은 보물로 신규 지정하였다.


보물에서 국보로 지정된 국보 제306-4호 ‘삼국유사 권4∼5’는 부산 범어사 소장본으로, 총 1책이며 전체 5권 중 권4∼5만 남아 있다. 범어사 초대 주지를 역임한 오성월(吳惺月, 1865∼1943)의 옛 소장본으로 1907년경 범어사에 기증된 것으로 전해진다.
* 『삼국유사』: 고려 일연(一然) 스님이 1281년(고려 충렬왕 7년) 편찬한 책으로, 고조선부터 삼국시대의 역사‧문화에 관한 설화 등을 종합했다는 점에서 한국 고대사 연구의 보고(寶庫)로 알려져 있음. 처음 간행한 시기나 간행 여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으나, ▲일연스님이 입적(入寂)하기 전 간행했다는 설 ▲1323년(고려 충숙왕 10년)경의 무극(無極)이 간행했다는 설 ▲1394년(태조 3년) 경 경주부사 김거두(金居斗)가『삼국사기』를 중간(重刊)하면서 함께 간행하였다는 설 등이 있음. 고려시대 판본은 알려지지 않았고 현존하는 가장 이른 판본은 1394년 경 판각된 조선 초기 판본임


현재 같은 계열의 판본으로 알려진 국보 2건(국보 제306호(송은본), 국보 제306-3호(파른본)과 비교할 때 범어사 소장본은 비록 완질(完帙)은 아니지만 1394년 처음 판각된 후 인출(印出) 시기가 가장 빠른 자료로서 서지학적 의미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기존 지정본에서 누락된 제28∼30장을 보완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이자, 1512년(중종 7년) 간행본의 오탈자를 확인할 수 있어 현재까지 알려진 삼국유사 판본에 대한 교감(校勘)과 원판(原板) 복원을 위한 자료로서 역사‧학술적인 중요성이 크다.
* 교감(校勘) : 같은 종류의 여러 책을 비교하여 차이나는 것들을 바로잡음
* 송은본: 송은 송석하 구장본 / 파른본: 파른 손보기 구장본
 

아울러 범어사 소장본은 서체, 규격, 행간(行間) 등에 있어 후대인 1512년 간행된 판본과 밀접한 양상을 보이고 있어 다른 지정본과 더불어 조선 초기 판본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이고, 단군신화(檀君神話)를 비롯해 향찰(鄕札, 신라식 음운 표기방식)로 쓴 향가(鄕歌) 14수가 수록되어 있어 우리나라 고대 언어 연구에도 많은 참고가 된다.


‘삼국유사 권4∼5’는 현존하는 동종 문화재 가운데 가장 빠른 인출본이자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기타 지정본의 훼손되거나 결락된 내용을 보완할 수 있다는 점, 종교・역사・지리・문학・언어・민속・사상 등 다양한 분야에 거쳐 고대 우리 민족의 생활상을 복원할 수 있는 사료의 집합체라는 인류문화사적 의의를 고려한다면 국보로 지정해 그 가치를 널리 알리고 보존‧관리하는 것이 타당하다.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壯勇營 本營圖形 一括)




보물 제2070호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壯勇營 本營圖形 一括)’은 정조(正祖, 재위 1776∼1800)의 친위부대였던 장용영(壯勇營)이 주둔한 청사의 본영(本營)을 1799년(정조 23년, 기미본), 1801년(순조 1년, 신유본)에 그린 건축화로서, 채색화 1점과 일종의 평면도안인 간가도(間架圖) 2점으로 구성되었다. 장용영은 도성 안에 본영(本營)을, 수원화성에 외영(外營)을 두고 운영되었기 때문에 이 자료는 도성 안(지금의 서울 종로 4가 이현궁 터 추정)에 설치된 장용영 본영의 현황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 장용영(壯勇營): 1793년 정조가 왕권 강화를 위해 설치한 군영(軍營)으로, 1785년 설치된  장용위(壯勇衛)라는 국왕 호위 전담부대를 개편한 것임. 정예부대로 강력한 왕권을 호위  하고자 운영되었으나, 정조가 승하하고 순조가 등극한지 2년 만인 1802년 폐지되었음 
* 도형(圖形): 건축이나 지형의 현황을 회화식 또는 도안식으로 그린 그림을 일컫는 조선시대 용어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壯勇營 本營圖形 一括)



이 도형은 장용영의 전반적인 현황과 관청의 증개축 변화를 기록하여 왕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든 자료이기 때문에 정확한 축적에 기초한 평면도와 정교한 필치로 건축물을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 과학적인 측량이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에 축적과 지형지세에 대한 높은 이해를 바탕으로 실제와 거의 유사한 대지의 형태를 표현했으며 ▲ 채색도와 간가도(間架圖, 평면도안)를 한 벌로 작성하여 보는 이로 하여금 건축적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고, ▲ 후대에 확장된 건물을 다시 그려 장용영이 확장되어 가는 과정을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

 


지금은 없어져 형체를 알 수 없는 장용영의 정확한 규모와 세부 건물의 배치와 기능을 알려주는 자료로서, 정간 구획의 대형 평면도와 이와 합치하는 채색 건물도가 함께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사례이자 유일한 도형이다.


‘장용영 본영도형 일괄’은 ▲ 제작시기와 목적이 명확하고 건축기록화의 제작 방법, 활용과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실증유물이라는 점, ▲ 간가도(間架圖)와 채색도를 함께 제작해 기타 간가도와 차별성이 돋보인다는 점, ▲ 측량에 기반을 둔 대지 형태를 반영해 단순한 기록화의 수준을 벗어나 뛰어난 기술적 성취를 보여준다는 점, ▲ 건물에 대한 사실적 묘사로 회화적 예술성과 더불어 풍부한 정보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역사‧예술‧학술적 가치가 충분히 인정되므로 보물로 지정해 보존하고 연구할 필요가 있다.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慶州 南山 長倉谷 石造彌勒如來三尊像)

 

보물 제2071호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慶州 南山 長倉谷 石造彌勒如來三尊像)’은 경주 남산 계곡 중 한 지류인 장창곡(長倉谷)의 정상부근 석실(石室)에 있던 불상으로, 관련 기록과 조각 양식 등으로 보아 신라 시대 7세기 작품으로 추정된다.
* 1924년 조선총독부 공문서에 의하면 본존상은 1924년 10월 10일 남산 장창곡 지점의  무너진 석실에서 발견되었고, 이전에 먼저 옮겨져 경주 내남면 월남리 민가(民家)에 보관되어 온 두 협시보살상은 조선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에 전시되어 오다가 본존상과 함께 완전한 삼존불 형식을 갖추게 되었음.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는 발견지인 장창곡 사진을 배경으로 삼존상이 전시되어 있음  

이 삼존상은 삼국 시대 미륵신앙과 신앙행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왔다. 이는『삼국유사(三國遺事)』에 644년(선덕여왕 13년) 생의(生義) 스님이 경주 남산 골짜기에서 미륵상을 발견하여 삼화령(三花嶺)에 봉안했다는 기록과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승려 충담사(忠談師)가 차(茶)를 공양했다고 하는 삼화령 미륵세존 설화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 『삼국유사』의 관련 기록:「탑상(塔像)」편 ‘생의사석미륵(生義寺石彌勒)’ 조(條)
같은 책「기이(紀異)」편 ‘경덕왕 충담사 표훈대덕(景德王 忠談師 表訓大德)’ 조


또한, 어린아이처럼 귀엽고 천진난만한 용모가 가장 특징적인 인상으로 꼽혀  ‘삼화령 애기부처’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 기록된 원소재지라고 알려진 삼화령(三花嶺)의 근거가 될 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아 불상이 발견된 계곡 명칭을 붙여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경주 남산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은 의좌상(倚坐像, 의자에 앉은 자세)을 취한 본존 미륵불과 좌‧우 협시보살 입상으로 구성되었다. 의좌상 형식의 불상은 중국 남북조 시대(5∼6세기) 이후 크게 유행하였고 미륵불을 상징한 예가 많다. 장창곡 불상의 경우 우리나라 의좌상 불상 중 시기가 가장 오래된 작품이자 희소한 예에 속한다.  
  * 협시보살(脇侍菩薩): 본존불을 좌우에서 보좌하는 보살


본존상이 원만한 얼굴에 두 눈을 아래로 지그시 내려 사색에 잠긴 표정이라면, 두 보살상은 1m 남짓한 아담한 체구에 머리에는 보관(寶冠)을 쓰고, 입가에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다. 이렇듯 어린아이 4등신 정도의 신체 비례를 보이는 불·보살상은 중국 6∼7세기 북주(北周)시대부터 수대(隋代)에 걸쳐 유행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7세기 신라에서 주로 조성된 것으로 보아 양식의 영향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경주 남산이라는 원 위치가 명확하게 확인된 점,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른 의좌형 미륵삼존불이자 신라인들의 신앙생활이 반영된 대표작이라는 점, 불심(佛心)과 동심(童心)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듯한 7세기 신라 전성기의 수준 높은 조각양식을 보여준다는 사실에 비추어 한국조각사에 중요한 학술‧예술적 위상을 지닌 작품이므로 보물로 지정할 가치가 충분하다.


한편, 이번 지정 대상에는 해인사와 갑사 두 유서 깊은 사찰에 400년 넘게 봉안(奉安) 되어 왔고 고려~조선 시대 조각사‧서지학‧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하게 평가되어 온 불상과 복장유물, 복장전적 6건도 포함되었다.


먼저, 보물 제2072호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및 복장유물(陜川 海印寺 願堂庵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 및 腹藏遺物)’은 해인사 경내 부속 암자인 원당암(願堂庵)의 보광전(普光殿)에 봉안된 삼존불상과 이곳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을 말한다.
* 해인사 원당암과 학조대사(學祖大師): 해인사 원당암은 해인사의 상징적인 암자(庵子)로서, 신라 진성여왕 때부터 신라왕실의 원찰(願刹)로 창건되었다고 함. 학조대사(學祖大師, 15세기)는 해인사 원당암과 이곳의 불상 조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해인사에 거주하면서 왕실의 후원을 받아 중창불사(重創佛事)와 대장경(大藏經) 인출, 해인사 법보전 및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조성을 주도하였고, 1495년 원당암 중창에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음
*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유물: 중수발원문(1694년), 후령통(候鈴筒, 불상이나 불화를 봉안할 때 금·은·칠보 따위의 보물을 함께 넣은 통), 사리호(舍利壺), 오보병(五寶甁, 청-적-백-흑-황색 비단으로 오보병을 마련하고 다시 이를 오방색으로 감싼 병), 직물, 보자기, 다라니 등 23점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설법인(說法印)의 수인(手印, 불보살을 상징하는 손모양)을 한 아미타여래좌상과 보관(寶冠)을 쓴 관음보살, 민머리의 지장보살로 구성된 불상으로, 아미타삼존 도상을 정확하게 구현한 작품이다. 이러한 삼존상 형식은 고려 후기에 새롭게 등장한 도상(圖像)으로 조선 후기까지 지속되었으나, 현존하는 사례가 매우 드물다.
* 설법인(說法印): 부처가 설법할 때 취하는 손 모양


조성 시기에 대해서는 불상의 형식과 복장발원문, 1490년 전후 왕실의 지원에 따른 해인사 중창(重創)과 그 이후인 1495년 원당암 중창이 이루어진 일련의 과정을 고려할 때, 조선 15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발원문 등 복장유물을 통해 해인사 법보전(法寶殿)과 대적광전(大寂光殿) 목조비로자나불좌상 조성을 후원한 왕실인물들이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확인되었다.


불‧보살상의 얼굴은 통통한 둥근 형상에 조밀하고 섬세한 이목구비, 위엄 있는 온화한 표정 등 수법이 서로 비슷해 같은 작가의 솜씨로 추정한다. 특히, 삼존상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앙련(仰蓮, 연꽃이 위로 향한 모양)과 복련(覆蓮, 연꽃을 엎어 놓은 모습)이 마주보는 연화대좌는 명나라에서 유행한 티베트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어서 당시 중국불교와 교류를 엿볼 수 있는 요소이다. 나풀거리듯 드리운 목깃 주름과 신체의 유기적인 흐름을 따라 사실적으로 조각된 천의(天衣) 등 뛰어난 조형미는 ‘영주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282호, 1458년), ‘평창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좌상’(국보 제221호, 1466년) 등 15세기 중·후반 왕실발원 불상들과 연관성을 보여준다.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은 고려 후기부터 본격화된 아미타여래와 관음, 지장보살로 구성된 아미타삼존 도상을 보여주며, 조선 초 15세기 불상의 양식적인 특징을 뚜렷하게 반영하고 있어 당시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사례가 되는 작품이다. ▲ 제작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원래의 봉안 장소를 벗어나지 않고 제작 당시 모습 그대로 신앙의 대상으로 보존되고 있다는 점, ▲ 복장유물을 통해 제작 배경과 참여자 등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삼존상과 복장유물을 함께 보물로 지정해 보호할 가치가 충분하다.


보물 제2073호, 제2074호, 제2075호는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전적’과 관련된 것으로, 각각 ‘대방광불화엄경-진본(大方廣佛華嚴經-晉本) 23첩과 ’대방광불화엄경-정원본(大方廣佛華嚴經-貞元本)‘ 5첩, ’제다라니(諸陀羅尼)‘ 1첩이며, 모두 본존 아미타여래좌상 복장에서 발견된 불경이다.


판각 시기는 대부분 고려 13세기 중엽이고 인출 시기는 조선 14세기 말∼15세기 초로 추정된다. 불상이 만들어진 후 복장이 개봉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결손 없이 보관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이렇듯 고려시대 판각된 화엄경이 일괄 발견된 예는 지금까지 매우 드문 사례다.


보물 제2073호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전적-대방광불화엄경 진본(陜川 海印寺 願堂庵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 腹藏典籍-大方廣佛華嚴經 晉本)’ 은 총 23첩으로, 표지의 색이 진한 감색과 연한 감색, 황색 계통으로 세 종류이다.


보물 제2074호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전적-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陜川 海印寺 願堂庵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 腹藏典籍-大方廣佛華嚴經 貞元本)’ 5첩도 진한 감색과 황색 계통의 두 종류로 제작되었다.
* 대방광불화엄경: 줄여서 ‘화엄경(華嚴經)’이라고 부르며,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 하나라는 것이 중심사상. 화엄종의 근본경전으로 ‘묘법연화경’(법화경)과 함께 한국 불교사상 확립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경전. 화엄경의 판본은 진본ㆍ주본ㆍ정원본 세 종류가 있음. 구체적으로 동진(東晋)의 불발타라(佛跋陀羅)가 번역한 ‘대방광불화엄경’ 60권본인 진본(晋本), 당나라 실차난타(實叉難陀)가 번역한 80권본인 주본(周本), 당나라 반야삼장(般若三臟)이 번역한 40권본인 정원본이 그것이다.  


이러한 진본‧정원본 모두 고려 중엽~조선 초 해인사의 사상적 경향과 출판인쇄문화의 실체와 역량, 그리고 국보 제206호 ‘합천 해인사 고려목판’에 포함된 개별 경판과 상관성을 파악할 수 있는 정보를 담고 있는 등 역사‧문화적 가치를 가진다.
 

보물 제2075호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전적-제다라니(陜川 海印寺 願堂庵 木造阿彌陀如來三尊像 腹藏典籍-諸陀羅尼)’ 1첩은 휴대용 수진본(袖珍本) 형식으로, 인출 시기는 조선 초 14세기경으로 추정되지만 1375년(고려 우왕 1년)이라는 정확한 판각연대가 있고 현재까지 발견된 유일본으로서의 희소성이 클 뿐 아니라 삼불상(三佛像: 아미타불‧비로자나불‧석가불)과 마리지천상(摩利支天像)이 표현된 변상도(變相圖)가 처음 확인된 경전이어서 고려 말 삼불상 구성과 마리지천 신앙을 알려주는 매우 주목되는 자료이다.
* 변상도(變相圖): 불교의 교리를 그림으로 표현한 그림. 보통 불교경전의 앞부분에 수록됨


이처럼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상 복장전적’인 보물 제2072호(대방광불화엄경 진본), 보물 제2074호(대방광불화엄경 정원본), 보물 제2075호(제다라니)는 지금까지 알려진 동종 문화재 중 보존상태가 최상급이고 같은 불상에서 일괄로 발견된 자료라는 점에서 완전성 또한 뛰어나다. 각각의 종류별로 서지학‧불교학적 가치가 탁월하므로 보물로 별도 지정해 보존‧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보물 제2076호 ‘공주 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사보살입상 및 복장유물(公州 甲寺 塑造釋迦如來三佛坐像‧四菩薩立像 및 腹藏遺物)’은 충청남도 공주 계룡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갑사(甲寺) 대웅전에 봉안된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사보살입상의 협시보살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이다.
* 갑사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ㆍ사보살입상 복장유물: 발원문(1617년), 후령통, 오보병, 직물,  다라니 등 263점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과 사보살입상’은 1617년(광해군 9년)에 행사(幸思) 등 9명의 조각승이 제작한 총 7존(尊)으로 구성된 대단위 작품이다. 이러한 7존의 형식을 갖춘 불상으로는 갑사 외에 ‘하동 쌍계사 대웅전의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사보살입상’(보물 제1378호, 1639년)과 1703년 ‘화엄사 각황전의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1703년) 등이 전해지고 있다.


갑사 석가여래삼불·사보살상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7존 형식의 불상으로는 현존 최대작(最大作)이자 최고작(最高作)으로서, 진흙으로 만든 소조(塑造) 불상은 평균 높이가 2.5미터이며, 보살상 역시 2미터 이상으로 제작되어 매우 장중한 인상을 준다. 제작기법에 있어서도 17세기 전반 대형 불상에 널리 적용된 소조기법으로서는 가장 빠른 예에 속한다. 따라서 이 불‧보살상은 조선 후기 삼불상‧사보살상 도상 및 제작기법 연구에 기준이 되는 중요한 기준작이다.


복장에서 발견된 조성발원문을 통해 1617년이라는 명확한 제작시기와 제작자에 대한 정보가 확인되며, 2,300여명이라는 조선 후기 최대 인원의 시주자들이 참여해 제작한 17세기의 역작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 수조각승 행사(幸思)는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석준(釋俊), 원오(元悟), 각민(覺敏)의 조각 전통을 이어 받은 작가로, 갑사 불상은 그가 참여한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이라고 평가되고 있음

역삼각형의 갸름한 얼굴에 우뚝한 삼각형의 콧날에서 행사의 조각기법이 잘 드러나 있고, 장대하고 늠름한 자세와 안정된 비례, 기백이 넘치는 표현 등에서 임진왜란 이후 조성된 대형불상들에서 보이는 시대적인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다.

 

소조관세음보살입상에서 발견된 복장유물은 처음 조성 당시의 현황에서 변형되지 않고 온전히 남아있는 것으로 판단되므로, 학술‧역사‧예술적 가치가 있는 소조석가여래삼불좌상, 사보살입상과 함께 보물로 지정해 보호할 필요가 있다.

보물 제2077호 ‘공주 갑사 소조석가여래삼존좌상‧사보살입상 복장전적(公州 甲寺 塑造釋迦如來三佛坐像‧四菩薩立像 腹藏典籍)’은 소조관세음보살입상에서 발견된 전적류 8건 8점이다. 필사본은 1건으로 흰 종이에 먹으로 쓴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이며, 그 외 7전은 모두 목판 경전류다. 간행 시기는 고려본과 조선 16세기 중반까지로 확인되며, 불상 조성시기인 1617년 이전에 인출(印出, 찍어서 간행함)된 자료들이다.
 
‘공주 갑사 소조석가여래삼존좌상‧사보살입상 복장전적’은 판본으로서의 중요성뿐 아니라 판각과 인출에 관련된 역사적 인물 그리고 장정(裝幀) 등에서 학술‧서지학적 가치를 지니며, 1617년 이전 인출된 복장 경전류의 유형과 성격을 파악하기 위한 일괄 유물로서 의미가 있다. 따라서 복장전적 8건 8점 역시 불상과 함께 보물로 지정해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연구하는 동시에 보존‧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문화재청은 해당 지방자치단체, 소유자(관리자) 등과 적극적으로 협조해 이번에 국가지정문화재(국보ㆍ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이 체계적으로 보존‧활용될 수 있도록 정부혁신 차원에서 노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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