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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목각인형을 쏟아낸 변수 묘(1) 강원대박물관에서 걸려온 전화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9. 3.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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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이 있는 조선시대 무덤이 정식으로 '발굴'되는 일은 매우 드물다. 예서 후손이란 거의 예외없이 그 문중門中을 말한다. 문중이 관리하는 조선시대 사대부가 무덤은 그때나 지금이나 이장移葬해야 하는 일이 빈다頻多하지만, 내가 오해하는지는 자신이 없으나, 이런 이장에 앞서 현행 매장문화재보호법상 정식 발굴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이를 둘러싼 논란이 없지는 않지만, 면면한 조상숭배 사상에서 비롯하는 독특한 터부 때문이다. 이장은 후손이나 문중이 알아서 할 일이지, 그런 행위에 앞서 아무리 국가권력이라 해서 감히 그에 위해危害를 가하는 요지가 다분한 '발굴'을 한단 말인가 하는 강렬한 배타가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그 무덤이 품은 무수한 정보가 공중으로 날라버리는 아쉬움은 크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더구나 그 과정에서 시신을 온전히 보존한 미라까지 발견되는 일이 심심찮으니, 그것이 담은 무수한 정보가 날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통탄할 일이겠는가? 


변수묘 목각인형



그런 사례로 꼽힐 만한 사안 중에서 나로서는 조선 전기를 살다간 변수(邊修, 1447~1524)라는 이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다. 그의 무덤은 97년 12월, 경기 양평군 창대리 원주변씨 묘역에서 속살을 드러냈다. 무덤 내부 해체 직후 그 직물과 목각 인형 수습을 위해 현장에 출동한 국립민속박물관 최은수 학예연구관 회고에 의하면, "그 묘역으로 도로가 관통할 예정이어서, 문중에서 묘역을 강원도 홍천으로 이장하려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런 소식을 민속박물관은 어떤 경로를 통해 접했을까? 보통 이런 일을 문중에서 자발로 먼저 관계 기관에 연락하는 일은 거의 없다. 자칫 이장 작업이 꼬일 수도 있고, 나아가 문중 일에 다른 사람이나 기관이 끼는 일을 달가워하지 않는 까닭이다. 


다시 최은수 선생 회고. "당시 민박 관장이 조유전 선생이셨는데, 강원대박물관에서 관장님한테 연락을 하셨더라구요. 급히 연락을 받고 현장에 출동해서 수습했지요." 


변수묘 목각인형



하지만 이 대목에서 최 선생은 약간 혼란이 있다. 조유전 관장한테 연락을 취한 이는 김남돈이 아니라 정연우였다. 지금은 예맥문화재연구원이라는 발굴조사 기관을 차려서 오랜 강원도 학예직 공무원 생활을 청산하고 평생만년 해먹을 요량인 정연우는 당시 강원도청에서 문화재 업무를 전담했다. 그의 말. 


"김남돈 선생한테서 연락이 왔더라고. 사정이 이러이러한데, 우리가 어쩔 수는 없으니, 조치 좀 해달라고. 그래서 자초지종 파악한 다음, 조유전 선생한테 연락을 드렸지." 


그렇다면 강원대박물관은 무슨 연이 닿아 변수묘 소식을 접했을까? 마침 이 박물관 터줏대감 김남돈 선생을 잘 아는 터라, 기별을 넣어 자초지종을 물었더니 대략 이런 말이 돌아왔다. 


"문중에서 우리쪽으로 연락이 왔더라고. 변수묘에서 목각 인형이 나왔자나? 문중 분들도 이상했겠지. 그래서 박물관이라고 하니깐 우리 박물관으로 연락을 한 모양이야." 


변수 부부 목관



당시 현장조사 과정을 통해 원주변씨 문중 사람들과 많이 접촉한 최은수 선생의 회고. "문중 어른 한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이런 유물 나오면 박물관에 연락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래서 아마 그렇다면 강원도에 박물관이 뭐가 있냐 해서 강원대박물관을 찾으셨나 보더라구요."


이 문중 사람이 아니었으면, 변수묘 출토 유물들은 영영 사라지고 없을지도 모른다. 


이에서 하나 궁금한 점. 발견 지점은 경기 양평군 창대리라고 하는데, 느닷없이 왜 강원대박물관이었을까? 그에 대한 김남돈 선생의 이어지는 전언. 


"아, 그 지점이 강원도랑 경기도 경계야. 실제 강원도라고 해도 돼." 


연락을 받은 강원대박물관은 현장으로 출동했다. 가서 보니, 현장 사정은 고고학이라는 눈으로 보면 처참했다. 다시 김남돈 선생 말. 


"회곽이었던 걸로 기억해. 그 곽을 깨고 목관을 이미 열어놨더라고. 목각 인형을 꺼내놓고, 시신을 염습한 옷가지들은 다 드러내놓은 상태더라고. 미라가 있었냐고? 없었어. 시신은 사 삭아 없어진 상태였는데, 다만, 수습한 직물류에 손톱 같은 게 있었어. 문중 분들께 "옆에다가 매장해 드리라"고 말씀 드리기도 했지." 


500년만의 외출 변수 할아버지



그렇다면 왜 강원대박물관은 그들이 직접 작업하지 않고 민속박물관으로 연락했을까? 앞서 대략 얘기했지만 다시 김남돈 선생의 말. 


"보니 이건 우리가 감당할 일이 아냐. 직물이나 목각인형, 목관을 우리 같은 대학박물관이 무슨 돈, 무슨 인력으로 보존처리를 해? 우리가 못하잖아? 그래서 도청으로 연락했지." 


이렇게 해서 연락을 받은 민박에서는 최은수와 이문현을 현지로 급파했다. 이런 대처를 보면 당시 조유전 관장은 천상 발굴쟁이였다. 생평을 발굴현장, 그리고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보낸 조유전은 연구소에서 실상 밀려난 상태였다. 그런 그가 나중에는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이 되어 화려하게 친정에 복귀했으니, 세상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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