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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현장

강남 봉은사 을축년 대홍수 나청호 칭송비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9.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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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 앞면 맨 위에다가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전서篆書로 ‘大本山奉恩寺[대본산 봉은사]’라 쓰고, 중앙 가운데는 큰 글씨로 위에서 아래로 ‘住持羅晴湖大禪師水害救濟功德碑[주지 나청호 대선사 수해 구제 공덕비]’라는 글자를 새겼다.

그 좌측에는 ‘乙丑七月 洪水懷襄 船浮蠶室 變桑而滄[을축 7월 홍수회양 선부잠실]’, 우측에는 ‘七百八人 呼號蒼黃 我師慈濟 德不可忘[칠백팔인 호호창황 아사자제 덕불가망]’이라고 썼다. 
 

 

뒷면을 보면 그 자세한 내용이 나온다.

결국 나청호 대선사가 을축년 대홍수 이재민들을 구제한 일을 찬양하는 내용인데, 찬양하는 글 자체는 퇴경退耕 권상로權相老(1879~1965)가 송頌이라는 형식으로 짓고 그것을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1871~1937)가 쓴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강남 봉은사 일주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편 작은 언덕 위 부도와 탑비가 모인 곳에 자리잡고 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에 막대한 피해를 본 사람 708인을 딩시 봉은사 주지 나청호가 구제한 일을 칭송했다.

당시 봉은사의 이재민 구호활동은 언론보도로도 대서특필되고 관련 기념책자 불괴비첩不壞碑帖까지 발간됐으니 이 송덕비도 그와 궤를 같이한다.

이 불괴비첩은 1925년 7~8월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와 그에 따른 한강 범람에 피해를 본 인근 부리도浮里島와 잠실리蠶室里 주민 708명을 구제한 내용을 정리했다.

이에 의하면 나청호는 한 사람을 구하면 10전씩 주기로 하고 배를 구해 떠내려 오는 사람과 강가 나무에 매달린 사람, 지붕 위에 오른 사람 등을 구제했다. 이상재, 정인보, 오세창 등의 당대 명사들이 칭송하는 글을 기고했다.

165쪽 서첩書帖으로 상하첩 2부로 구성됐으며 1985년 삼장원三藏苑에서 책자로 발간하면서 관련 내용을 덧붙였다. 

본론으로 다시 돌아가 저 비는 昭和 4년, 1929년 7월 나청호羅晴湖(1875~1933) 생전에 세운 비다. 나는 이 점이 좀 수상쩍다. 생전 공덕비인 까닭이다.

청호晴湖는 법호다. 학밀學密이라는 법명으로도 알려졌다. 경기도 고양 출신. 아버지는 나윤천羅允天. 아버지가 철원 보개산 심원사深源寺의 석대암石臺庵에서 18년 동안 기도하던 중 꿈에 이승異僧을 보았는데, 어머니에게 태기가 있어 태어났단다.



12세 때 어느 관상가가 보고 출가하지 않으면 명命이 짧아진다고 하여 오대산 명주사明珠寺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1897년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1898년 개당開堂하여 불경을 강의하니 가르침을 받는 이가 많았다고 한다.

1908년 서울로 와서 불교개혁사업에 전념하였고, 1912년 봉은사奉恩寺 주지가 되어 80여 개 말사를 관장했다.

특히 구호사업에 힘을 기울여 봉은사 주위 임야를 개간해 유랑민을 정착시키기도 했다. 1933년에 나이 58세로 입적하니 그의 생애는 봉은사 나청호 선사비奉恩寺羅晴湖禪師碑에 정리됐다.
 

이 비가 기념하는 시점이 을축년 대홍수라, 그 발생 시점은 1925년, 대정大正 14년이라, 일본 연호를 새겼다 해서 쪽팔리다 해서 大正이라는 일본 연호는 쪼아서 없애버렸다.

 
 

여기에 이를 세운 시점이 1929년 소화昭和 4년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소화 두 글자는 쪼아 없애버렸다.

 
 

 
 

 
 

 
 

조선 선종 갑찰 봉은사 사적비라 글은 권상로, 글씨는 김돈희다.

 
 

전서는 안종원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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