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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부소산성 기슭 사비기 초기 백제건물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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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쌍북리 유적서 1천500년전 사비 백제 대형 건물터 확인
송고시간 2020-10-13 10:04 
임동근 기자
대가야 토기·중국제 자기 등 유물 출토

 

www.yna.co.kr/view/AKR20201013040500005?section=culture/scholarship

 

부여 쌍북리 유적서 1천500년전 사비 백제 대형 건물터 확인 | 연합뉴스

부여 쌍북리 유적서 1천500년전 사비 백제 대형 건물터 확인, 임동근기자, 문화뉴스 (송고시간 2020-10-13 10:04)

www.yna.co.kr

 

뭐랄까? 교란이랄까 아니면 중복이 극심해서인지 나로서는 판단이 쉬 서지는 아니한다. 다만 하나 분명한 점은 부소산성 남쪽 기슭에서 이번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이 건물터 흔적이 왕궁, 특히 그 부속건물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암튼 백제가 웅진에서 사비로 도읍한 직후에 지은 흔적이며, 그 위격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는 없지만, 제법 규모를 자랑한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지난주 둘러보면서 조사단 설명을 들었으나, 조사단도 심란한 구석이 많은 듯하다. 오늘 보도자료를 통해 봉인이 풀렸다. 

 

남쪽에서 북쪽을 지향하는 사진이라. 발굴지점은 보다시피 백마강이 띠처럼 두른 부소산 기슭 남쪽이다. 딱 정남향이다. 그 서쪽 같은 부소산 기슭에는 저명한 관북리유적이 있다. 

 

일반이 이해가 쉽고, 보아서 와! 하는 성과라면 저번 경주에서 시도한 비대면 공개를 시도했겠지만, 그러기에는 무엇보다 파긴 했지만, 드러나기는 했지만, 그 정체를 종잡기 힘들다. 

 

매입한 땅을 3군데로 나누어 발굴했으니,  우선 앞에 첨부한 사진을 보면서 위치감각을 익히도록 하자. 

 

 

 

부여가 지랄 맞은 점 중 하나가 120년이나 도읍한 이곳에서 이곳이 왕궁이다! 임을 확증하는 곳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왕궁이 어디였는지 아무도 모른다. 혹자는 저 관북리 앞쪽을 지목하기도 하고, 아니면 이번 조사구간과 관북리유적 전면 건물밀집지역을 거론하기도 하나, 드러난 게 없으니 골이 아플 수밖에. 

 

 

 

부소산성이 배후에서 왕궁을 호위하는 역할은 분명하니, 그 전면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왕궁 위치가 드러나야 관북리던 이번 쌍북리건 그 성격을 어느 정도는 가늠한다. 만약 그 전면 어딘가에 왕궁이 있었다면, 저 발굴지점은 그 전면을 조망하는 언덕이라, 주거지역일 수는 없다. 왕궁을 뒤 언덕에서 조망하도록 놔두는 일은 없다. 

 

후원에 해당하는 지역일 수밖에 없거니와, 이것도 왕궁 위치가 나와야 판가름한다. 

 

 

 

드러난 양상이 이렇다. 남북 방향으로 찍은 것인데, 위쪽이 부소산을 향하는 지점이라 더 높다. 이번에 드러난 흔적은 크게 그 북쪽 지점 건물과 그 아래쪽 조사구역을 동서방향으로 관통하는 회랑 혹은 도랑 같은 열라 긴 시설로 대별하거니와, 아래쪽 도랑 혹은 회랑이 직선으로 동서방향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나로서는 매우 독특했다. 

 

 

조사단에서는 조사구역 북쪽 중앙지점 젤 높은 곳에서 출현한 이 건물 흔적을 중시했거니와, 이에다가 힘을 주어 12미터 곱하기 7미터짜리 이 건물이 위격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건물터를 중심으로 주변에서 드러난 부속 건물이랄까 하는 지점들이다. 이를 보면 이른바 중심건물을 중심으로 品자를 거꾸로 세운 듯한 배치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걸 저리 그림으로 표시해서 그렇지, 현장가서 보면 좀, 아니 아주 복잡한 양상이다. 

 

문제는 저 동편 건물지 앞쪽에 깊이 3미터 정도에 이르는 큰 직사각형 구덩이를 팠다는 점이다. 열라 깊어 언뜻 왕궁리 유적 똥통 같은 느낌을 주지만, 똥통이라면, 똥물을 빼내는 배수구가 있어야 할 텐데 그게 없는 점이 걸린다. 

 

바닥은 보니 이른바 풍화암반층이라, 푸석푸석한 돌도 아니고 흙도 아닌 그런 토질이다. 파기는 상대적으로 쉬웠을 법한데, 그걸 파고서는 기둥을 꽂았던 듯한데, 문제는 깊이가 다르고 크기가 제각각이다. 

 

 

 

 

출토유물 중에는 이른바 가야 혹은 가야계토기로 간주하는 것들이 있어, 이쪽 분야 전업자들이야 이걸로 대서특필을 하겠지만, 저와 같은 접근방식을 나는 선호하지 아니한다. 저들이 진짜로 가야토기라면 가야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와서 부여에서 살면서 남긴 흔적일 수도 있고, 혹은 그쪽에서 보내온 것일 수도 있거니와, 문제는 저들이 과연 가야(계)토기인가 하는 확신을 내가 할 수는 없다. 나는 유보한다. 

 

 

가지구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려다본 것이다. 신라 고려시대 흔적도 섞였다는 말을 들은 듯하다. 백제 유적은 참말로 깨끗한 데가 없다. 왜 이러니?

 

 

이번 조사 복판인 나지구 남쪽으로 북쪽으로 올려다 본 것이다. 

 

 

이게 앞서 말한 그 길다란 도랑 혹은 회랑 같은 그거다. 말목인지 뭔지 모르겠당

 

 

 

중심 건물 바닥인데 이것도 애매하다. 

 

 

 

동편부속건물지 전면에서 출현한 구댕이다. 함정인가? ㅋㅋㅋㅋ

 

 

 

중심건물 동편건물지 뒤꼭대기서 전면을 조망했다. 

 

 

 

이게 아마 가지구 중간쯤에서 확인한 건물터 같다. 주변으로 돌렸다!

 

王인지 主인지 모르겠다. 卅이라는 지적도 있더라. 

 

 

칠토기라 했지만, 아직 분석을 한 것은 아니니 잠정이라 해둬야겠다. 

 

 

뭐 이런 것들이 수습되었다고 하는데, 암튼 백제유적 열라 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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