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능산리 사지 이 백제시대 목교가 다리껄이 아니라 실은 수세식 똥통이라고 배병선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이 말한다.
그 말 듣고는 현장 확인차 그제 하루 휴가를 낸 김에 들렀다.
감상은?
똥통 맞다.
(2015. 8. 6)
***
이상과 같은 페이스북 포스팅에 아래와 같은 댓글들이 있었다. 음미할 대목이 많아 전재한다.
(노기환) 형태와 장소를 생각하면
그렇다면!
생각해봐야하는 유적이, 유구가
있을 듯!
(김태식) 유감스럽게도 저걸 발굴했을 땐 기생충 검사를 하지 못했다.
현장을 안내한 부여문화재센터 심상육 부장에 의하면 저와 흡사한 목구조 시설이 부여 관북리에도 발견됐다 한다. 본인이 조사한 유적으로 능산리와 차이는 그곳엔 판재를 대고 뒤쪽엔 흙채움을 한 점이라 한다. 관북리는 추가 조사를 위해 유구는 그대로 묻었다는데 추가 발굴에서는 반드시 기생충 검사가 따라야 한다. 관북리 시설이 똥통이면 볼짝없이 이곳도 똥통이다.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도 저와 비슷한 똥통 2기가 발굴됐다. 왕궁성 서쪽 변을 남북으로 관통하는 수로에다 설치한 위치성이 똑같다.
백제인들은 기본에 건물 서쪽에다가 측간을 설치한 모양이다.
(노기환) 미륵사지도 동원 동쪽 수로에 저런 흔적이 있지요!
발굴 당시엔 화장실이라 생각 못했지요!
보고서에 언급이 없으니!
보고서 확인하자!
똥통에서!
(김태식)미륵사지도 저 비스무리한 게 있나요?
(노기환) 수로에서 목제가 보였지요!
보고서 확인하고
답 하겠습니다!
(김태형) 혹 중국처럼 측면 칸막이 개방형 똥통.....
(김태식) 요즘 절간 해우소 비슷하지 않을까요?
(김태형) 저기 선암사 뒷깐....글구보니 선암사도 그 옆에 연못이 있던거 같은데...언제부터 있던 건지는 모르지만
(김규원) 경주 천관사지도 화장실 추정 유구가 있는데 발굴조사서 한번 확인해보시지요..
(신동훈)
https://www.scielo.br/img/revistas/mioc/v98s1/15p17.jpg
헤이안시대 소위 "수세식 화장실". 흐르는 물 위에 화장실을 지었고 지금도 그 물이 흐르고 있다면 기생충 검사해도 결정적 증거가 나오긴 어려울수도 있을 듯.
일본 논문 보면 저 수세식 화장실의 기원을 야요이시대 해자 위에 있던 화장실로 연결시켰던데 저런 형태의 인분 처리 시스템이 혹 백제시대의 도시유적에서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습죠.
저 시대에 수세식이라는게 반드시 푸세식보다 우월한 시스템이라고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위에서도 지적하셨던 분이 계셨듯이 수세식이라는건 인분을 거름으로 재활용할 가능성을 사실상 포기하는 시스템이라.
(Jeongwoo Lee) 좋은 아이디어 였네요. 해자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성을 공격 하길 주저하는 적군들.
(신동훈) 우리나라 신라 반월성의 경우 해자에는 인분 오염이 많았습니다. 성 안의 오수를 해자로 흘려 보냈을 가능성이 큰듯. 해자가 기능하던 당시에는 그림같은 성 주변의 연못이 아니라 온갖 오물로 악취가 났을 가능성이 더 크겠지요.
(Jeongwoo Lee) 해자가 생각보다 더 강력한 방어시설이군요. 영화에서 보면 갑옷 입은 채로 해자에 막 첨벙첨벙 떨어지던데.
(신동훈) 일본도 해자에서는 인분이 꽤 차있었던 흔적이 나왔었습니다. 야요이시대부터 인분 오수는 해자로 흘려 보냈던듯 해요.
도시에서는 인분을 어떻게 처리하는가가 가장 문제입니다. 이 인분이 효과적으로 처리 되지 못하면 그 해결책은 수도를 옮기는거죠.
아주 이른 시기의 일본사를 보면 수도를 뻔질나게 옮기는 사실이 나오는데 제가 보기엔 종교적 이유 어쩌고 보다도 사람은 몰려살지 인분은 쌓이지... 제일 좋은건 다 때려치고 다른데 새로 짓는거 아니겠어요.
인분이 효과적으로 처리 안되면 도시자체가 붕괴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제때 먹는것이 도시민에게 공급되는것 만큼이나 중요하다고 할수 있겠지요...또 특히 인분이 상수원과 지속적으로 계속 섞이게 되면 수인성전염병에 취약해져 유사시 도시민이 몰살합니다.
대도시를 유지한다는건 보건공학적으로 보면 상당히 어려운 기술이에요...
***
같은 취지의 글을 나는 같은 공간에 2017년 8월 6일 다음과 같이 게재했다.
수세식 똥통은 능산리 절터에 이미 있다
경주 안압지에서 통일신라시대 수세식 똥통이 발견됐다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발표했다.
이것이 최초의 발견이라고 표현했다고 안다.
이 표현 조심해야 한다.
그 수세식 똥통이 그보다 수백년 전 백제시대 유적인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발견됐기 때문이다. 이거 발굴조사단인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목교, 다시 말해 나무다리라고 발표하고 현장에도 목교로 재현해 놓았지만, 오판이요 오독이다. 이건 나무다리가 아니라 똥통이다. 수세식 똥통이다.
발굴보고서 읽어보면, 그 답은 나온다. 목교木橋라 했지만 그거라고 하면 기본 필수시설이 없다. 그것이 없는 이유를 훼손이라고 보았다.
이에 대해서는 졸저 《부여 능산리고분.사지-지난 100년의 일기》(부여군, 2017)를 참고하기 바란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와 같은 논의가 오갔다. 이 역시 음미할 대목이 적지 않다.
(신동훈) 수세식이라고 하면 푸세식보다 굉장히 발달했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물에 변을 투척하는 방식은 일본의 경우 야요이시대 유적에서 이미 나옵니다.
www.scielo.br/scielo.php?script=sci_arttext&pid=S0074-02762003000900019
http://www.scielo.br/img/revistas/mioc/v98s1/15p12.jpg
8-9세기 경 일본의 "수세식" 화장실-.
위에 부여 능산리 도 흐르는 물 위에 다리 모양 구조물을 만들고 그 위에서 용변을 봐서 흐르는 물로 사라지게 했다.. 그 말씀이시지요?
The settlements of the Yayoi Period came to have a much greater population than ever before. As a result, many people had to live together within the confines of a limited amount of space all the year round.
With regard to settlements in low lying land at the very least, it has been established that they were encircled by a moat and divided into several areas including a residential area, storage buildings, sacred area, and burial area.
The existence of toilets, however, has not been firmly established. Nonetheless, the scientific analysis of the sediment obtained from moats encircling the Yayoi settlements has revealed the interesting facts that follow.
Coprophilous insects (Dung beetles) (Fig. 13) such as Onthophagus and Aphodius were found with aquatic insects including dytiscids in the moat encircling the Ikegami-sone Site, Izumi City, Osaka Prefecture and excrement was left alongside the moat.
This led Kanazawa and Miyatake (1990) of the Osaka City Museum of Natural History to conjecture that these moats once had a structure to allow excrement to be washed away when the water level rose due to rainfall etc.
위 논문의 이 이야기의 구조물과 발상이 같을 듯. 야요이시기에 이미 비슷한 발상의 화장실이 있었다고 하니 한국도 백제가 아니라 훨신 더 올라갈지도 모르죠.. 물로 변을 씻어 사라지게 한다는 발상의 화장실..
그런데 이런식의 "수세식"이 반드시 발달된 형식이라고 말 못합니다. 동아시아의 경우는 인분을 거름으로 쓰는 집약농경이 발달하면서 푸세식이야 말로 거름 자원을 모아두는 역할을 하게 되어서.. 푸세식이 반드시 "수세식"보다 후졌다고는 이야기 하기 어려운듯.
일본의 경우 우리나라 통일신라시대인 나라시대에 이미 수도인 헤이조쿄에 골목마다 끌어들인 물을 저택 안으로 한번 들어왔다 나가게 하면서 그 위에 화장실을 지어 용변 본것을 흘러 나가게 했다고 합니다. 위 논문에 그 이야기도 있으니 한번씩 보시길..
용변을 물로 흘려 보냈다는 거 자체가 아직 인분을 거름으로 쓰는 본격적 집약농경의 시대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반증일지도. 17세기 이후부터는 한중일 삼국에서 모두 인분을 거름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용변도 반드시 집에 돌아와서 보라고 했다는 것이 농담만은 아닙니다.. 이 시대가 되면 용변을 흘려보낸다는건 상상도 못할 낭비일듯.
다만 부여는 도성안에 푸세식 화장실인지 단순히 용변을 담아둔 구덩이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인분이 모여있는 구덩이가 여러 군데 있었어요. 저희가 현지 고고학자분들 도움으로 확인한것이니 만약 이것이 푸세식이 맞다면 백제는 푸세식과 소위 "수세식"이라는것이 공존해 있었던 듯.
여담입니다만 부여가 도성내 토양에 기생충란 오염도가 매우 높습니다. 경주와 비교해도 부여가 훨씬 심해요. 부여는 도성으로 사용되던 시기 도성 내 주기적으로 범람이 상당히 있었다고 판단합니다.
(Jeongwoo Lee) 그런데 경주 안압지 똥통은 구멍이 너무 작지 않습니까? 어떻게 정확히 그 구멍 안으로 통과시킬 수 있었는지. 혹히 다른 용도가 아니였는지 궁금해요.
(신동훈) 인더스문명 5천년전 도시 유적에도 "수세식"화장실이 있습니다 거기도 이번 화장실 처럼 용변 본 후에 물을 부어 내리게 설계..
(신영문) 수세식은 위험해요 콜레라 이질의 온상입니다. 저는 일본 고대 왕도의 잦은 천도가 수인성 전염병 발생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원령 때문이라고 사서에 기록된 것이죠.
(Jeongwoo Lee) 정말 재밋네요! 그럼 원령공주(모노노케 히메)에 나오는 이것들이 다 그것들이란 말인가요.
(신영문) 아뇨 이렇게 귀여운거 말고요.
(박찬희) 목교가 수세식 화장실이었군요!
(김태식) 목교 대신 똥통을 넣으면 모든 의문이 봄눈 녹듯합니다.
저 똥통은 나중에 전통학교에서 재발굴했지요. 부여박물관 발굴조사 보고서는 아마 원문 제공이 박물관에서는 아니될 터인데, 한국전통문화대학교에서 재발굴 보고서는 제공합니다. 그거 함 보세요
(박찬희) 네 고맙습니다. 너무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신동훈) 고대도시라면 상수원과 하수의 엄격한 분리가 가장 중요하죠. 이 두가지가 섞이면 주기적으로 수인성 전염병이 발생합니다. 먹는 물에 용변본 하수가 섞이면 안돼요.
그런면에서 조선후기 들어오면 서울시내 인구가 20만이 되는데 서울시내 우물안에 이미 하수가 섞여 들어간다는 기록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왜 서울에서 죽어라 한강물 길어다 팔아 먹는 물장수가 흥했는지 알만한 일인데.. 물장수의 기원이 어찌 되는지요? 언제부터 한강물 팔아 먹기 시작한건지.
조선시대 서울 인구 급증한 시기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짐작해 봅니다.. 조선 후기에 서울시내 우물물을 사람들이 길어다 먹었을지 모르겠어요. 허드렛물로나 쓰지 않았을까.. 짐작.
(신영문) 마을 우물을 쓰다가 오염되어 집집마다 우물을 판건 아닐지요 그나마도 오염되면 이름있는 우물이나 약수를 길러다니고..
(신동훈) 수세식이라는게 냄새가 안난다. 위생적이다 이건데. 이런 장점은 정화조가 나오고 상수와 하수가 확실히 분리된 요즘이나 의미가 있는 장점이지..옛날처럼 인분이 거름 자원이고 상수 하수의 분리기술이 없는 때에는 수세식이 반드시 푸세식보다 낫다고 장담 못한다.. 그 말씀입니다.
(신영문) 김부장님 능산리 절깐에 변소가 너무 커요..워디 예비군 훈련장 변소만하네요...한꺼번에 변을 보러 몰려댕겨서 그런건지.... 중들이 많았단 얘긴지 용변보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수용인원이 많았는지...
(김태식) 안 커..다리라 해서 크게 만들었을 뿐. 왕궁리 똥통이랑 규모 엇비슷.
(신영문) 나중에 바로 잡아져야 하겠습니다.
(Jeongwoo Lee) 그냥 조용히 넘어가는 게 어떨까요.
(신영문) 좀 고민좀 하고 복원하게 경종을 울려야 합니다 낚인 공무원이야 억울하겠지만.. 고증 잘못한 사람한테 공사비 추징하고... 그래야 지들 기분내키는 대로 고증을 안하죠...
(DongHoon Shin) 제 생각엔 서울시내 우물의 오염과 물장수의 출현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언제 한번 이 문제를 천착해 보았으면 합니다.
(Jeongwoo Lee) 저는 함경도 북청 출신인 분이 말씀하셔서 찾아본 적이 있는데, 그쪽 사람들이 서울에 와서 물을 배달하는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북청 물장수라는 말이 생겨났다고 합니다. 최초 문헌 등장은 이조 철종 때. 안동김씨 저택에 일하는 김서방이 그 집안에서 쓰는 물을 길어댔다고. 세도가니까 깨끗한 물 먹고 살았나 보죠. 물의 수요가 늘어나서 고향친구들 불러들여 조직적으로물장수를 했다고 합니다.
급기야 일제시대 향수를 달래며 김동환이 진 시가 '북청 물장수'. 지금 생각해 보면 서울시 위생을 책임졌던 비지니스맨.
(DongHoon Shin) 조선후기 한성을 유지시킨 음지의 두 직업군-. 인분처리를 했던 사람들과 물장수 일것입니다. 전자는 하수를, 후자는 상수를 담당했다는 점에서 이 두 직업이 없었으면 수도는 유지되기 어려울것이라 봄...
(Youngmoon Shin) 북청 물장수 생각보다 연원이 짧을 수 있습니다. 수도 공급안되는 고지대에 배달 다니던 일제강점기때 얘기일 수도... 조선시대에 향촌을 떠나서 서울에 집단을 이루는 부류들은 군인들이 유일했을 겁니다...
(DongHoon Shin) 19세기 후반까지는 물장수 연원이 소급 되는 듯 합니다.. 그런데 그 위는 모르겠군요.
(Jeongwoo Lee) 새벽부터 '동포여'를 외치던 인분 장사와 고요히 꿈길을 밟고 와서 머리맡에 찬물을 솨아 퍼붓고 간 물장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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