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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왕릉원(능산리고분군) 3·4호분 속내를 까발리니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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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산리 무덤 전경
식민지시대 4호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부여 왕릉원이라고 지금은 간판을 바꾼 능산리 고분군 제3·4호분 두 무덤을 파제꼈으니 그 일반공개를 25일 오후 2시에 한댄다. 

조사현장 지번은 충청남도 부여군 능산리 산15-5(부여 왕릉원)
부여 왕릉원은 종래 능산리고분군이라 하는 중앙 지점 무덤 7기를 중심으로 그 좌우 동·서쪽에도 한 무더기가 있어 각각 동고분군 서고분군이라 이름한다.

1971년 중앙고분군 7기가 정비 복원된 데 이어 근자 서고분군 4기를 한국전통문화대학에서 파제꼈고 봉분을 복원했으며, 동고분군 7기는 부여연구소에서 조사 중이다. 
 

식민지시대 3호분 입구
식민지시대 3호분 돌방 뒤편
식민지시대 4호분 무덤방 입구
식민지시대 4호분 돌방 뒤편
식민지시대 4호분 안에서 밖을 내다본 모습



이번에 조사한 3·4호분은 식민지시대 조사가 이미 있었다. 다만 당시 조사는 도굴갱을 타고 돌방 안으로 들어가 바닥에 놓인 유물을 수습하고, 돌방 내외부 사진과 실측도면을 제시하는 수준이었다.

이에 불만을 지닌 부여연구소가 봉분과 돌방 관계, 봉분 흙 종류, 조사 당시 주변 지형을 알아내겠다며 파제꼈는데, 미안하지만 이걸 알아내서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나는 동의하지 못한다. 다른 이유를 대야 한다. 
 
앞서 연구소는 2020년 중앙고분군 일대에 대한 시굴조사를 진행해 3·4호분 매장시설과 봉분 위치가 다름을 확인했으니, 이것은 성과 중 하나로 꼽을 만하다.
 

3호분. 무덤방 앞으로 배수로가 보인다.
4호분. 무덤방 앞으로 배수로가 안 보인다.

 
이를 바탕으로 2021년이래 봉분 조사를 실시하고 내부까지 파고 들어갔다. 고분 축조과정을 확인했다 하며, 만든 시점을 짐작할 만한 유물 자료도 확보했다는데, 글쎄 또 몇사분기? 이런 식의 축조 시점을 제시하려나?

암튼 이번 조사를 통해 식민지시대 지형도와 발굴조사 결과를 종합할 적에  중앙고분군에는 서쪽과 동쪽에 두 개 능선이 있었음을 확인했다 한다.

3·4호분은 서쪽 능선에 위치하며, 동쪽 얕은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나머지 고분들이 위치하는 형세라고. 
 

3호분 무덤방 밖에서 안으로 바라본 모습
4호분 무덤방 밖에서 안으로 들어가는 지점

 
무덤 구조와 만든 과정은 이렇게 밝혀냈다고. 먼저, 무덤을 만들 자리에 돌방 출입구를 기준점으로 삼고 지름 20m 안팎인 봉분을 구획한다.

경계지점에 높이 40㎝, 너비 25㎝ 안팎인 다듬은 돌(호석)을 세우고, 그 내부에 봉분을 쌓았다. 이때 호석을 따라 그 바깥으로 1.4m 가량 사이를 두고 깬돌을 열지어 놓았다.
  
돌방은 당시 생활면에서 4.5m 가량을 파고 들어가서 평면 ‘凸’자 모양 구덩이를 만든다. 능선 정상부 쪽이 돌방 뒷벽이고, 경사면 아래쪽이 출입구여서 출입구 쪽으로 갈수록 얕아지는 구조라고.
 

3호분 호석
3호분 배수로
4호분 널길 매납 돌뚜껑 항아리. 하도 욕을 해서 그런가? 이번에는 지진구 진단구라는 헛소리 하지 않았네. 이건 태항아리다. 죽을 때 태를 가져갔다.
4호분 도굴갱 수습 목관 장식 금동장식

 
돌방은 잘 다듬은 판돌을 이용해서 만들었다. 봉분은 돌방 천장 기준으로 3.5m가량 남았다.

땅을 깊이 파고 들어갔으니, 동시대 신라 무덤에 견주어 백제 무덤은 봉분은 단순한 표식 기능을 했다.

시신을 안치하고 출입구에는 판돌을 막아두고 널길은 흙으로 채운 뒤 호석과 연결했다.

3호분과 4호분은 기본 축조 과정이 동일하지만 세부 차이는 있다고. 즉 3호분은 돌방 중심을 기준으로 봉분을 동쪽과 서쪽을 번갈아 가며 쌓았지만, 4호분은 수평으로 쌓았다고.

또한 3호분에서는 돌방 출입구에 대형 석재를 덧대고 바닥에 널찍한 석재 2매를 겹쳐 만든 단과, 널길 배수로(너비 60cm, 최대 깊이 100cm) 등이 확인되지만, 4호분에서는 추가 시설이 따로 없다고. 
 

3호분 널길 채움 연화문 수막새 파편



4호분에서는 동에 금을 입혀 만든 불꽃형태 목관 장식금구[장식금구裝飾金具]가 확인되는데, 익산 쌍릉 출토품과 동일하다. 3호분에서는 호석열 석재 사이에서 암키와 편, 널길 채움토에서 연화문수막새 조각이 확인되었다.

이들 기와는 모두 인접한 능산리사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으로 무덤을 만드는 과정에서 유입된 것으로 판단된다고.
 
이번 성과에 대한 언론 정리는 내 과거 직장 그것으로 갈음하니 참고하라.


 
무덤 보호 위한 돌 두고, 흙 쌓고…왕릉원 3·4호분 축조 과정은
송고시간 2023-10-23 09:56 
25일 발굴 조사 현장 공개…"1천500년 전 모습 복원 위한 중요 자료"
익산 쌍릉 유물과 같은 관 장신구·연꽃 문양 기와 조각 등 확인

https://www.yna.co.kr/view/AKR20231023041900005?section=culture/scholarship

 

무덤 보호 위한 돌 두고, 흙 쌓고…왕릉원 3·4호분 축조 과정은 | 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김예나 기자 = 백제가 충남 부여에 도읍을 둔 사비기(538∼660) 왕릉급 무덤 떼인 '부여 왕릉원'의 일부 무덤 구조와 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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