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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 THESIS

불꽃같은 삶을 살다간 역사학도 이이화

by taeshik.kim 2020. 3.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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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박하다 하겠지만, 유명 혹은 저명인사는 오비추어리를 미리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한데 언론계 오랜 속설이 있다. 미리 써놓으면 오래 가신다는 그런 속설 말이다. 이이화 선생도 그런 편이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랬다. 그의 오비추어리를 쓴 1월 22일만 해도, 전해듣기로는 오늘내일 한다 해서 저리 준비하고 있었다. 선생이 오래도록 관여한 동학관련 단체 관계자가 우리 공장 대선배신데, 연락을 주셨다. 고비를 맞았다는 것이었으며, 내일 중으로 장례준비위원회를 구성할 예정이라고도 했다. 


이후 언제쯤인지 지금은 야인이 된 정운현 당시 국무총리비서실장도 연락을 줬다. 같은 내용이었다. 그래서 미리 써놓은 저 오비추어리를 보여주기도 했다. 




오늘내일이라는 분이 두 달을 버티다 가셨다. 


지금은 김천시로 통폐합한 경북 금릉군 구성면에 상좌원이라는 동네가 있다. 원이라는 글자가 있으므로 옛날에는 역참이 있던 곳임을 알겠다. 행정구역 명칭으로는 상좌리라고 하는 이 상좌원이라는 동네는 연안이씨 집성촌이라, 이 동네에 가례증해판목이라는 목판본 묶음이 있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 연안이씨 집성촌과 관련한 저명한 문화유산으로 방초정이라는 조선후기 정자가 있으니, 근자 국가보물로 승격되었다. 


이 동네가 바로 이이화 선생 본적이다. 주역 대가라는 그의 아버지 이달 선생이 바로 이 동네 연안이씨다. 




다만 이이화 선생은 이 상좌리에 대한 뿌리 의식이 그리 크지는 않은 듯했다. 그도그럴 것이 이 동네서 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자라지도 않았으니, 그리 크게 느끼지는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다. 옛적에 제가 김천입니다 했더니, 그래요? 김천 어드메요 하기에 선생님 고향 구성 인근입니다 했더니, 으레한 반가움만 보였을 뿐이었다. 아버지 고향이니 반갑다고는 했지만, 그로서는 그 구성에 대해 별로 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본다. 


그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이 비슷한 경험을 하겠지만, 선생은 천상 이웃집 할배요 이웃집 아재였다. 투쟁적인 삶을 살았지만, 사석에서 만난 선생은 맘씨 좋은 할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이른바 학교 교육 기준으로 이렇다 하게 내세울 학력이 없었지만, 그보다 공부 많이 한 사람 몇 안 된다. 


박석무 선생이 당시는 한국학술진흥재단 시절이 아니었다 하는데 암튼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시절 그 학술진흥 대상에서 학력 규정을 철폐했다. 다시 말해 교수 박사 석사 아니라 해도 학술지원을 받을 수 있게끔 규정을 바꿔 버렸다. 




박석무 선생이 이리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당시 규정으로는 이이화 선생은 연구재단 지원을 받을 수가 없었다. 학력이 안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박 선생도 그 규정 바꾼 이유 중 하나로 선생을 들었다. "이이화 선생 같은 분이 왜 지원을 못 받는단 말이냐"라는 말로 되묻기도 했다. 


유독 역사학계에서 재야니 강단이니 하는 구분이 심각해서 상대에 대한 공격이 서슬 퍼렇다. 그런 점에서 그는 분명 재야인데도 재야라 해서 강단으로부터 공격받은 적 없는 희유한 케이스다. 정식 대학교육을 받고 관련 학과를 나와야 정통역사학자인가?


이 돼먹지도 않은 구분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 인접 고고학도 이 꼬라지라, 개돼지도 3년만 교육받으면 하는 고고학을 사람이 왜 못한단 말인가? 


선생이 던진 질문 의문을 나는 이것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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