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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영분榮墳, 출세는 조상 음덕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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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음성군 생극면 능안로 377-15  권근 삼대 묘소 및 신도비


요새 사가정을 다시 읽기 시작했는데, 이 양반 조선전기 문한文翰의 대명사와 같아 무지막지한 글을 남겼고, 또 조선전기 그 화려한 문물정비에 관여하지 않은 데가 없다. 그 자신은 시에 미친 사람으로 표현하곤 했으니, 그 문집 역시 방대하기 짝이 없다.

이 사가정은 세종이 다음 세대를 대비하고 키운 이른바 집현전 학사 출신이지만, 이 집현전 그룹이 계유정난을 고비로 생사가 갈라졌으니, 사가정은 그가 남긴 글도 그렇고, 실제 행적도 그러해서 물타기 전형이라, 그 자신 성삼문이나 박팽년만큼 비분강개형도 아니고, 그렇다 해서 그 반대편에 서서 정난을 주도할 만한 배짱도 없는 천상 서생 그것이라

막상 계유정난이 났을 때는 대세에 편승해 훈작도 받고 해서 무난한 삶을 살았고, 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상대적으로 정치바람을 덜 타는 문한 분야에서 독보를 구축했다. 처신이라면 사가정처럼 해서 살아야 한다.

기억이 아리까리한데 위에서부터 권근 권제 권람 무덤이 아닌가 싶다



객설이 길었다. 한국고전번역원이 제공하는 그의 문집 《사가문집》 제6권 서序에 '영분榮墳하러 가는 권 교리權校理를 전송하는 시의 서 [送權校理榮墳詩序]' 라는 글이 있어 무엇보다 그 제목에 쓰인 영분榮墳 이라는 말이 눈에 띈다.

이 榮墳을 찾아보니 "새로 과거에 급제하거나 벼슬한 사람이 그 향리의 조상 묘를 찾아 풍악을 잡히며 그 영예를 봉고奉告하던 일"이라는 설명이 보이는데, 사전이 뭐 이래? 이런 데다가 꼭 봉고奉告 같은 말을 쓰야 하겠는가? 그것도 풀이에다? 사전이 이리 되면 봉고라는 말을 또 찾아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봉고란 글자 그대로 받들어 알린다는 뜻이다.

영분榮墳은 글자 그대로는 무덤을 빛나게 하다는 뜻이라, 이 경우 무덤은 조상 무덤을 말하며, 榮은 이 경우 영어 문법을 빌리자면 사역동사라, 영광되게 만들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주체는? 그 객체가 조상이니 당연히 그 후손이 되겠다. 그 후손이 무슨 일로 출세해서 혹은 영광스런 일이 생겨, 제가 조상님 음덕에 이런 좋은 날을 만나게 됐습니다 라고 해서 조상 무덤에 가서 고하는 일을 말한다.

이 영분이 무엇인지 저 글이 명확하게 보여준다. 저 글은 사가정 족질族姪이면서 권람權擥의 아들이고, 권제權踶의 손자이면서 그 유명한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증손인 권건權健이라는 젊은 친구가 대과에 급제하고서 그런 영광을 지금의 충북 음성(문장에서는 충주라 표현한다)에 있는 저들 조상 무덤에 가서 고한다기에 그 출발에 즈음해 축하글로 써 준 것이다.

예서 잠깐 저 집안 조상들을 보면, 고려조에 출사해 고관대작을 지낸 권근은 조선왕조 개국과 더불어 문물정비에 1등 공신 중 한 명이며, 그 아들 권제는 정인지 권제 안지 라고 해서 훈민정음 해례본을 쓴 트로이카 중 한 명이며, 권람이야 한명회 신숙주와 더불어 수양대군 모사꾼으로 계유정난을 획책하고는 출세가도를 달린 이다.

앞이 권제, 뒤가 권근 아닌가 싶다.



서거정은 권람보다는 네 살 아래지만, 실상 집현전 동기동창쯤 된다.

저 축하서 앞 부분을 고전번역원 옮김으로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성스러운 왕조는 문교를 숭상하고 효도를 중히 여겨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진출하면 부모가 생존한 경우에는 잔치를 열도록 은전을 내려 부모를 영광스럽게 하고, 별세한 경우에는 묘소에 제사를 지내도록 은전을 내려 조상을 영광스럽게 하니, 매우 성대한 일이다.

나의 족질族姪인 홍문관 교리 권후 길창 權侯吉昌(권건權健)은 익평공翼平公(권람權擥)의 아들이고, 지재止齋 문경공文景公(권제權踶)의 손자이며, 양촌陽村 문충공文忠公(권근權近)의 증손이다.

권후가 일찍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명성이 매우 자자하였으니, 그때 대부인이 살아 계셔서 영화가 이미 지극하였다. 지금 또 영분하러 충주忠州로 향하니, 문충·문경·익평 세 부군府君의 묘소가 모두 그곳에 있다. 권후가 국가의 은총을 받아 선영先塋을 빛나게 하였으니, 참으로 영광스러운 일이다. 떠나려 할 때에 사문의 교유하는 선비들이 시를 지어 전별하고, 나에게 한마디 말을 해 줄 것을 구하였다.

恭惟聖朝崇文敎。重孝理。士由科目以進者。親在則賜恩榮宴。歿則賜祭榮墳。甚盛擧也。吾族姪弘文館校理權侯吉昌。翼平公之子。止齋文景公之孫。陽村文忠公之曾孫也。侯早擢巍科。聲名籍甚。大夫人在堂。榮已至矣。今又榮墳向忠州。文忠,文景,翼平三府君之墓皆在焉。侯承國家之寵恩。以賁先塋。亦榮矣哉。將行。斯文交遊之彥。詩以爲贐。求予一言。


이 글을 쓴 시점을 사가정은 무술년이라 했으니, 1478년, 성종 9년이 된다. 한데 영분하러 간 시점이 좀 묘하다.

3대 신도비가 나란히 섰다.


그의 행적을 민족문화백과사전을 동원해 추리면 1472년(성종 3)에 진사가 되었고 147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직강이 되어 사가독서하였다. 이듬해 감찰을 거쳐, 교리·응교·전한·예조좌랑 등을 지냈다. 1479년 응교로 있을 때 시폐책(時弊策)을 제목으로 홍문관원들에게 시험을 치렀는데, 일등을 하여 안마(鞍馬)를 하사받았고 했으니, 영분하러 간 시점은 사가정 글을 보건대 홍문관 교리가 되었을 때다.

사가정 증언에 의하면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면 부모가 안 계시면 묘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도록 은전을 내려 조상을 영광스럽게 한다고 했지만, 별시문과에 급제한 시점을 기준으로 삼아도 그의 영분은 2년이나 지나서였다.

따라서 권건은 무슨 일이 있어 차일피일 미루다가 저 무렵 홍문관 교리에 제수되면서 비로소 음성으로 가서 조상 무덤을 찾았다고 봐야할 성 싶다.

그건 그렇고 영분이 무엇인지 저 사가정 증언은 명료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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