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시대 스님들이 인도를 관광 여행갔겠는가?
물어볼 것이 있어야, 궁금한 것이 있어야 목숨 걸고 구법 여행을 하게 되는 법이다.
조선 후기 일본으로 사신을 간 통신사 중 한 분이 (이름을 잊었다)
일본을 다녀와서 거기 어떻더냐는 왕의 물음에 한 대답으로,
"문명화 되었습니다. 물어보는 질문을 보면 그러합니다"라는 취지로 대답을 하였다는데 (자세한 대화는 기억 못하지만 대충 이랬다),
성리학 이기설에서 결국 물어볼 만한 부분은 거의 정해져 있는데 그 부분을 찝어 물어보니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알겠다는 것이리라.
책을 읽다가 너무 궁금하니 그 일본의 유학자도 조선통신사 수행원에게 와서 물어본 것이리라.
이 시기가 17세기 중반인가 어쨌던가 그랬다.
결국 그렇다.
신라승들이 당으로 무더기로 나간것 도,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인도로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길을 떠난 것도,
결국 신라의 불교 수준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 궁금한 것도 많고 모르는 것도 많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는 말이다.
당나라는 가 보지도 못했다는 7세기 원효의 주장이 어째서 중국 대륙을 뒤흔들 수 있었는가 그 이유를 우리는 여기서 볼 수 있다.
당나라로 간 신라승들은 당나라에서 자신들의 의문이 풀리지 않았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도로 가는 수 밖에 없겠다. 정관연간에 현장은 당나라에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이미 서역으로 길을 떠난 신라승들은 그렇게 이해할 도리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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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열정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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