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벽화 속의 인물이 고구려인이 맞을까?
7세기를 놓고 보자면, 서역에 고구려인이 출현할 가능성보다 신라인이 출현할 가능성이 훨씬 높았다고 할 수 있다.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이라는 책이 있는데-.
여기는 당나라 때 천축으로 구법 여행을 간 고승들 이야기가 적혀 있다.
모두 61명의 이야기가 적혀 있는데,
중국인 41명, 신라인 8명, 고구려 1명, 티베트 2명, 베트남 4명, 강거국 1명, 고창국 2명으로 한반도계가 9명이나 된다.
그 중 신라인이 8명인데, 문제는 이들 신라인의 상당수가 삼국통일이 이루어지기 전인 7세기 중엽경에는 이미 인도에 도착한 사람이 상당히 많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인도 구법여행하면 혜초만 기억하는데 사실 혜초는 구법여행을 한 고승의 반열에는 끼지 못한 분으로,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되지 않았다면 이 분은 잊혀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분이다.
혜초보다 앞선 시기, 서기 600년대 중반에는 이미 신라사람들이 당나라를 거쳐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인도에 도달하는 사람이 많이 나오고 있었다.
사마르칸드에는 여기에 7세기 신라인이 나타난다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말이다.
저 사람들이 신라인이 맞다면 정치적인 어떤 이유로 저기 나타났는지는 필자는 알 수 없다.
다만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사마르칸드까지 도달한 한반도인은 적어도 7세기 중엽경에는 신라인이 훨씬 많았다는 점은 기억해 둘만하다.
P.S.1)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는 점도 주목하시기를. 삼국유사의 기록은 중국측 기록인 大唐西域求法高僧傳과 서로 맞는 부분이 많다.
광함(廣函)註 115의 ≪구법고승전(求法高僧傳)≫註 116에 말한다. “석 아리나(釋阿離那) 혹은 야(耶)라고도 쓴다발마(跋摩) 혹은 마(磨)라고도 쓴다는 신라인이다. 처음 불법을 구하고자 일찍이 중국에 들어왔다. 석가모니의 자취를 찾아뵐 생각하니 용예(勇銳)가 더욱 늘어나서 정관(貞觀)註 117 연간 중에 장안(長安)을 떠나 오천축국(五天竺國)註 118에 이르렀다. 나란타사(那蘭陁寺)註 119에 머물며 율(律)과 논(論)을 많이 보고 패협(貝莢)註 120에 베꼈다. 고국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였으나, 기약한 바를 이루지 못하였고 갑자기 절에서 죽으니 나이가 70여 세였다.
이를 이어서 혜업(惠業)註 121, 현태(玄泰)註 122, 구본(求本)註 123, 현각(玄恪)註 124, 혜륜(惠輪)註 125, 현유(玄遊)註 126가 있고 또 두 명의 이름이 일실된 법사 등이 있으니 모두 자신을 잊고 법을 따라 석가의 교화를 보려고 중천축(中天竺)에 간 것이다. 그러나 혹은 중도에서 죽고, 혹은 생존해서 그 절에 주석한 자도 있지만 결국 신라와 당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자는 없고, 오직 현태법사만 겨우 당으로 돌아왔는데 또한 그 마친 바를 알 수 없다.
천축인은 신라를 구구타예설라(矩矩吒䃜說羅)라고 하는데 구구타는 계(雞)를 말하고, 예설라는 귀(貴)를 말한다. 그 나라는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그 나라[신라]는 계신(雞神)을 공경하여 높이기 때문에 관에 깃을 올려서 장식한다”라고 한다.
*** Editor's Note ***
필자가 말하는 벽화는 사마르칸트 아프라시아브 궁전 벽화를 말한다.
한국에는 널리 알려진 이유가 꿩 깃털을 머리에 꽂은 사신 그림을 고구려인으로 보는 까닭이다. 물론 신라 사신이라는 견해도 있지만 소수다.
나는 고구려 사신이라는 주장에는 매우 비판적이지만 그렇다 해서 특정한 견해를 지닌 것은 아니다.
필자가 인용한 대당서역입당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은 당나라 스님 의정이 찬한 것으로 그에 등장하는 신라 스님들은 모두 내가 이 블로그 고대인명사전에 다 정리해 놨으니 그 인명으로 검색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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