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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전설은 사실을 어디까지 반영하는가, 개성 남대문 한석봉 편액의 경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3. 12.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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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한복판에 있는 개성 내성의 남문 '남대문'에 얽힌 이야기이다.

조선 중기의 어느 날, 개성부 사람들은 남대문에 새로 편액을 달기로 했다. 그 편액글씨를 동향의 명필 석봉 한호(1543-1605)에게 청하자, 그는 직접 개성에 왔다.

그리고 사다리를 타고 올라, 미리 걸어둔 빈 편액에 글자를 쓰기 시작했다. 남녁 남자를 쓰고 큰 댓자를 쓸 제, 누군가가 그 사다리를 걷어찼다.

석봉을 시샘하던 이였는지, 그가 망신도 당하고 기왕이면 어디 부러졌으면 했던 모양이다.

절체절명의 순간, 그러나 석봉은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큰 댓자의 마지막 획에 워낙 힘이 들어가 있어서, 붓을 쥔 채로 대롱대롱 매달려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남아있는 개성 남대문 편액의 큰 댓자 마지막 획이 유달리 굵고 힘차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라고 - 한다.

이와 비슷한 전설이 안동 탁청정의 석봉 글씨 편액에도 전하는 것을 보면, 당시에 꽤 널리 퍼졌던 이야기였던가 보다.

그런데 아쉽지만(?) 이는 사실일 리가 없다. 대개 조선시대 편액은 글씨를 받고 그 글씨를 유지에 윤곽선을 뜨거나 아예 직접 붙여 각을 한 뒤 칠을 해 만든다.

편액 제작 방법만 알아도 저 석봉 편액 전설은 금방 반박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말이다.

하지만 저런 전설이 나오게 된 배경은 짐작할 만하다. 우선 위나라 위탄(179-253)이란 이의 고사가 있다.

그가 도르래에 달린 바구니에 타고 누각 처마 밑까지 올라가서, 붓을 들고 '능운대' 석 자를 쓰고 내려오니 머리가 허옇게 세었다고 한다. 제법 그 모티브가 비슷하지 않은가?

또 석봉은 편액글씨를 쓸 때 대개 원나라 승려 설암(14세기)의 굵고 짜임새있는 서풍을 반영한다. 이때 유달리 획에 힘이 들어가므로, 튀어나오며 울퉁불퉁하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이 툭 튀어나오는 부분을 두고, 붓이 편액에 딱 붙을 만큼 힘을 주었다고 느낄 만도 하다.

그리고 석봉의 처지도 이런 이야기가 나타나는데 한몫하지 않았을까.

그는 양반이 아니었다. 글씨 솜씨를 인정받아 임금의 총애를 얻고 뒷날 흡곡현령, 가평군수 같은 벼슬을 역임하지만, 사자관으로 출세했다는 점 그리고 신분의 하자는 그를 평생 따라다닌 듯하다.

지금도 그의 글씨를 '사자관체'라고 낮추어 보는 이들이 있다는데 당대에는 어땠겠는가.

석봉을 시샘하는 이들에게 기회만 주어졌다면 저렇게 사다리를 걷어찼을 것이다.

물론, 우리의 석봉 선생님은 멋지게 위기를 넘겼지만 말이다.


***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현판 글씨 쓰다 백발이 된 중장仲將 위탄韋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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