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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생존 앞에 추풍낙엽 같은 충忠과 효孝, 살고자 하는 아우성만 버둥칠 뿐

by taeshik.kim 2024.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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忠으로 지탱하는 국가한테 언제나 고민은 孝였다. 유가는 둘의 조화, 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일체화를 꾀했지만 개소리라, 그것이 충돌하는 지점은 너무나 많았다. 

저 두 윤리는 다름 아닌 유가의 비조 공자의 생각을 집약했다는 점에서 유가의 절대 윤리로 군림하거니와, 군군신신 부부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우며,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말은 그런 직분에 각자 충실하면 그것을 곧 忠의 완성으로 보았다. 

군사부君師父라는 말은 실은 저 말을 푼 데 지나지 아니해서, 문제는 평상시엔 그럴 듯해 보이고, 그 조화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듯이 보이나, 천만에. 생각보다 저 윤리는 너무나 잦은 충돌을 보였으니 특히 전쟁통에 두 윤리가 충돌하는 문제는 심각하기 짝이 없었다. 

전쟁이 났는데 임금을 따를 것인가? 가족을 챙길 것인가? 왜 전쟁통만 났다 하면 무엇보다 관리 공무원부터 자기 가족을 먼저 피신시키려 안달복달했겠는가?

孝를 위해 忠을 버렸다는 혐의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저 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한 다음에야 忠이 발동했던 것이니, 이는 역설적으로 얼마나 忠이 허약한 논리 혹은 윤리인지를 유감없이 증명한다 하겠다. 

저 忠은 전근대 왕조국가에서뿐만 아니라 근대 국민국가 체제에서도 언제나 문제였다. 이 忠도 忠하는 대상이 전근대랑 근대가 달라서, 전근대는 王이었지만, 근대는 國이라는 점에서 심대한 차이가 있다. 근대 국가의 탄생은 곧 忠하는 대상이 王에서 國으로 이동이다. 
 

 
바로 이에서 公과 私라는 또 다른 베리이이션이 발생하는데, 국민국가는 私를 억압하고 장 자크 루소 표현을 그대로 빌린다면 일반의지라는 이름을 내세운 절대 공공윤리를 내세우는데, 이 절대 공공윤리를 받침하는 종교가 바로 시민종교이며, 그 시민종교를 구성하는 절대 조건이 바로 애국심이었다. 

간단히 추리건대 근대 전근대를 막론하고 忠이 公의 절대 근거라면, 孝는 私의 발현이었다. 

전근대건 근대건 그 忠하는 대상이 비록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시종일관하면서 私를 억누르면서 公을 발현하고자 한다는 데 차이가 있을 수는 없다. 다만, 저 私를 지탱하는 절대 존재가 孝인 까닭에 그런 孝를 버릴 수는 없으니, 그 孝를 忠으로 등치하고자 획책한 것이다. 

이 일체화 전략이 성공했다 하는 순간 전쟁이 터진다. 이 전쟁은 여지없이 얼마나 忠이 허약한지를 폭로한다. 실은 忠은 孝의 발현 혹은 그것이 공적으로 발현한 다른 윤리가 아니라 실은 철저한 계약관계에 기반하는 이익나눔 관계라는 것은 일찍이 한비자가 갈파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 한비자를 한 번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렇다고 孝는 그 자체로 성공을 구가했는가? 천만에. 孝 역시 개소리 뿐이었으니, 전쟁통 혹은 그것이 상징하는 절체절명의 목숨이 담보하는 순간에는 그조차도 여지없이 무너졌다는 데 더 큰 심각성이 있다. 

忠이 달아나고 남은 孝, 그 효 또한 본능이 아니라는 인간 본연의 폭로가 이어졌으니, 그것이 바로 전쟁통과 목숨이 걸린 순간이었다. 

전쟁통에, 목숨이 경각에 달린 순간에 누구나 忠을 버리고 孝로 달려가는 듯했지만, 그 孝도 알고 보니 본능이 아닌 강요와 윽박에 지나지 않았네?

목숨 앞에 애미애비도 안중에도 없었고, 그런 애미애비보다 언제나 처자식이 먼저였고, 그런 처자식보다 내가 지금 푹 빠져 지내는 첩이 먼저였으며, 그런 첩조차도 내 목숨이 경각에 달리니 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이었다. 

이 모든 국난이 양귀비로부터 초래했으니, 저 양귀비를 죽이라는 신하들 겁박을 당 현종 이륭기는 이길 수 없었다. 그가 살기 위해 그렇게 아끼는 양귀비조차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던 것이 인간이다. 

전쟁과 목숨이 폭로한 인간, 그것은 더 끝갈 수 없는 인간 본연이었고, 그것은 생존의 본능이었다. 

이 생존의 본능 앞에 忠이 어디 있으며, 孝는 또 어디에 있고 悌는 또 어디에 있는가? 살고 싶다는 본능, 그 처절한 본능밖에 남지 않는다. 

이미 내 눈으로 새로운 해와 달을 보았으니, 하나의 심장으로 어찌 옛 산과 들을 생각하겠습니까라는 이현운의 절규는 실은 인간 본성의 폭로였다. 

그에 견주어 충신은 불사이군한다는 신념을 고수하다 마침내 목이 달아난 강조야말로 변종이었던 것이다. 

목숨조차 초개처럼 버릴 사랑? 글쎄 가능이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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