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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서대문형무소가 그리 행복했다는 근로정신대 할머니

by taeshik.kim 2020. 5.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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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 기자회견을 계기로, 다시금 식민지시대 강제동원 형태 중 위안부와 정신대 차이에 대한 고찰이 이런저런 지면을 통해 이뤄진다. 할머니도 지적했듯이, 그리고 이제는 상식이 되다시피했거니와, 위안부와 정신대는 왕청난 차이가 있다. 

 

이 둘만 고정해서 볼 적에도 가장 왕청난 차이는 위안부가 논란이 적지는 아니해서, 적어도 현재까지 드러난 마당을 보면, 이 폭압적인 반인권적 행위에 대한 국가권력의 강제동원 형태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데 견주어(이 점이 두고두고 문제가 된다), 후자는 명백히 국가폭력이라는 점이다. 

 

 

일본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낸  피해자 중 김성주 할머니. 2018. 11. 29

 

 

아래 기사를 보면, 작성시점이 1998년 11월 16일, 22년 전이라, 이때는 내가 사회부를 떠나기 직전이다. 대략 보름 뒤인 그해 12월 1일, 나는 문화부로 전근했다. 따라서 이 무렵 나는 기상청과 시교위를 담당할 때다. 그런 그때 내가 왜 느닷없이 이 기사를 쓰게 되었는지 자세한 기억은 없다. 

 

다만 기사 내용, 그리고 당시 희미한 기억을 되살린다면, 그 무렵 이와 같은 과거사 청산관련 사안에는 내가 출입처 관계없이 깊이 관여할 때이므로, 그에 발단이 되어 오지랍 넓게도 이 사안을 내가 직접 취재하겠다고 나섰을 가능성이 크다. 

 

1998.11.16 07:01:29

정신대로 끌려가 不具, 반세기만에 장애인 2등급 

 

(서울=연합) 金台植기자= 일제말기 여자근로정신대로 일본군 군수물자 공장에끌려가 강제노동에 혹사당하다 일본인에게 두들겨 맞아 불구가 된 70대 할머니에게 반세기만에 장애인 2등급 판정이 내려졌다.

 

서울 강서구청은 16일 일제시대 근로정신대 출신으로 왼발을 거의 쓰지 못하는 강복점姜福点 할머니(72.강서구 화곡동)에게 지난 4일자로 장애인 2등급 증명서와 함께 한시적인 생계보호를 보장하는 의료보호 대상자 증명서를 발급했다고 밝혔다.

 

이에따라 姜씨는 모든 의료기관에서 무료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됐으며 구청 등이 주선하는 자활보호 활동을 통해 매달 20만원씩의 생계비를 지원받게 된다.

 

姜씨에게 장애인 판정을 내린 서울 강서제일성심병원은 "姜 할머니는 양 무릎이 오랜 관절염으로 고생하고 있으며 특히 왼쪽 무릎은 두 관절이 썩어 무너져 내린 상태로 보행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직계 가족없이 1평 남짓한 지하 사글세방에서 혼자 살고 있는 姜씨는 일제식민통치 말기인 1943년 2월 25일 17살 때 고향인 충남 대천군 오천면에서 큰아버지 집에서 얹혀 살던 중 근로정신대로 서울 영등포에 있던 일제의 군수물자 공장인 동양방직 영등포공장에 끌려가 해방 때까지 2년6개월 동안 강제노동을 하면서 일본인들에게수시로 성폭행까지 당했다.

 

이 기간에 배고픔을 참지 못하던 姜씨는 해방을 몇달 앞둔 어느날 밤 동료 여직원 한 명과 함께 공장안에 있던 기숙사를 빠져나와 철조망을 넘어 두번째 탈출을 시도하던 중 모토야마(本山)라는 일본인 감시원에게 붙들려 성폭행당하고 실패로 무참히 두들겨 맞아 왼쪽 무릎이 불구가 됐다.

 

姜씨는 "무릎이 부러졌는데도 당시 일본인 감독은 치료는커녕 해방 때까지 매일 12시간씩 실을 잦는 일을 계속 시켜 왼쪽 다리를 아주 못쓰게 됐다"면서 "해방 뒤에 병원을 찾았더니 의사가 다리를 절단하라고 했으나 다리없는 병신이라는 얘기는 듣기 싫어 치료 한번 제대로 못하고 오늘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관련 사진 및 인터뷰 있음)

(끝)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2차 손해배상 청구소송 항소심 선고에서 승소한 피해자 김옥순 할머니. 2019. 1. 30

 

기사 내용으로 보아 서울 강서구청이 뿌린 보도자료를 발단으로 삼아, 내가 끼어든 모양이라, 기사 말미에는 (관련 사진 및 인터뷰 있음)이라 했거니와, 이 인터뷰는 20년이 더 지난 지금도 기억이 뚜렷하다. 

 

서울시인가 강서구청을 통해 기별을 넣고 약속을 하고 찾아간 화곡동 할머니가 기거하던 곳 처참한 모습은 아래 관련 기사 첫 대목에서 내가 잘 드러냈다고 본다. 

 

1998.11.16 09:55:33
"차라리 서대문형무소가 낫더라"-근로정신대 증언 

 

(서울=연합) 金台植기자= "게이죠후 에이토호 도요보시키 가부시키가이샤"(경성부 영등포 동양방직 주식회사). 서울 강서구 화곡6동 995의 22 강서구청 맞은 편 야트막한 산 바로 아래 정원수 몇 그루까지 있는 번듯한 지상 2층짜리 양옥주택. 그 지하로 몸을 숙이고 마치 땅굴 같은 좁은 통로를 더듬어 5m가량을 들어가면 성인 남자 한 명이 몸을 뉘기에도 불편한 1평 남짓한 방이 나온다.

 

이곳이 한창 꽃다웠어야 할 젊은 시절 근로정신대로 일제 군수공장에 끌려가 일본인에게 몸까지 짓밟히고 또 그것이 남겨준 불구(不具)라는 평생 씻지 못할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강복점姜福点 할머니(72)가 의지하는 방이다.

 

방으로 기자를 안내한 할머니는 "올 여름 집중호우 때는 방에 물이 가득 찼어요. 올핸 비가 워낙 많이 왔어야지. 그래도 이 방이라도 있으니 다행이지. 그런데 요즘은 (집) 주인 보기도 민망해 죽겠어요. 이 방이 보증금 백만원에 월세가 9만원인데 다섯달치 방세를 못냈어요. 구청에서 주선해 줘서 쓰레기 재활용 일을 하고 매달 20만 4천원씩을 받고 있는데 그걸로 생활이 되야지. 다리가 아파 걷기도 힘드니 어디 나가려면 택시를 탈 수 밖에 없는데 무슨 돈으로 방세를 내겠어요"라고 말문을 열었다.


힘 없이 화두를 꺼내던 할머니는 왼쪽 다리를 못쓰게 된 까닭을 묻는 질문에 한동안 아무말 없이 한숨을 쉬다가 "그 얘기 다 하려면 한도 끝도 없을 거예요. 전생에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렇게 됐는지"라며 근로정신대로 이야기를 옮겨갔다.

 

 

후지코시 근로정신대

 


할머니는 4살 때 친척집에 다녀온다며 배를 타고 집을 나섰던 부모님이 풍랑을 만나 졸지에 고아가 된 뒤 고향인 충남 대천에서 큰아버지 집에 얹혀 살았다.


그러다가 17살이 되던 1943년 2월 25일 면사무소에서 나온 일본인 2명에게 이끌려 근로정신대로 징집돼 배를 타고 어디론가 갔다가 내륙지방 어느 곳에 내려 창고 안에 들어가니 자기와 같은 처녀 1백명가량이 `바글바글'했다.


이윽고 일본인들이 '얼굴이 이쁜 애들은 따로 불러내' 딴 데로 데려갔다.


"얼굴 이쁜 얘들은 아마 위안부로 끌려갔을 거에요. 그리고 나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열차로 실려갔는데 도착해 보니 게이죠후 에이토호 도요보시키 사부시키 가이샤였어요. 공장이 굉장히 컸는데 둘레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기숙사는 작업장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있었어요".

 

군복을 짜기 위한 실을 뽑는 이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조선 처녀는 2천5백명가량. 조선인 처녀들은 노리방이니 와인당, 각코부, 덴죠키, 소보키, 닌구니 하는 각종 작업부서에 배치돼 하루 12시간씩 일주일씩 번갈아 가며 낮과 밤에 일했다.


이런 조선처녀들에게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배고픔과 함께 이고라는 이름의 현장감독 등 일본인들의 공공연한 성폭행이었다.

 

"일본인들은 자기들끼리는 쌀밥을 먹으면서도 우리한테는 기름짜고 남은 깻묵을 먹였어요. 그걸 먹고 한 시간도 버티기 힘들어요. 하루는 너무 배가 고파 식당에 밥을 훔쳐 먹어러 갔다가 일본인 감시원한테 들켜 몸둥이로 죽도로 얻어맞았어요. 또 일본사람들이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았어요. 야근할 때는 식당 가기가 두려웠어요. 식당가는 어두운 길목 길목에 일본인들이 숨어있다가 우리들을 덮치곤 했어요. 우린 성노리개였던 셈이죠".

 

이를 참다 못한 할머니는 어둠을 틈타 2번의 탈출을 시도했다.

 

첫 번째는 동료 9명과 함께였고 두 번째는 벚꽃이 만발하던 1945년 4월 23일께 친구 한 명과 함께 탈출을 감행했다.


그러나 두번 모두 감시원한테 붙잡혀 죽도로 얻어맞았다.

 

 

근로정신대

 


특히 두번째 붙잡혔을 때는 실패로 두들겨 맞아 왼쪽 다리가 부러진 채 탈출을 시도했던 친구와 함께 얼굴을 맞댄 채 묶여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에서 하루를 꼬박 서 있어야 했다.

 

"현장감독은 치마를 올린 채 우리 둘을 묶어 세웠어요. 속곳이 있었나요. 아랫도리는 벌거벗은 채였죠. 제 다리는 그 때부터 쓰지를 못했어요".

 

이런 치욕을 당한 할머니는 이어 경찰서를 거쳐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져 한달 열흘을 지내다가 다시 공장으로 돌아왔다.


할머니는 이때가 근로정신대 생활 2년 6년개월 동안 가장 행복하던 때였다고 회고했다.


"때 되면 하루 세끼 콩밥 나오죠. 누가 때리기를 하나요, 내 몸을 달라고 하나요. 형무소에서 나간다니까 죽기보다 싫더라구요. 형무소가 그렇게 좋은 덴 줄 처음 알았어요".

 

이런 姜할머니에게 반세기가 넘어 돌아온 것은 장애인 2급 판정 증명서와 한시적 생계를 보장하는 의료보호 대상자 증명서 뿐이었다.
(끝)

 

근로정신대로 갖은 압박 시달린 군수공장보다 서대문형무소가 그리 좋았다는 할머니....

 

당시만 해도 나는 닥치는 대로 이와 같은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만나며 증언을 채록하던 시절이라, 이 정신대 문제도 그리 심각성이 다대함을 절감했지만, 몸뚱아리는 하나였고, 기자는 수퍼맨이 아니었다는 말만 해 둔다. 

 

그나저나 우리 공장 사진 DB가 워낙 망실이 심해, 저 할머니 사진도 지금 찾아보니 걸리지 아니하는 것으로 보아 인멸된 게 아닌가 한다. 

 

 

 

정의연 사태에 부친다

지난주 수요집회 한 장면인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로 한바탕 난리가 난 마당이라 언론의 관심이 평소보다 더 집중됐거니와 평소보다 규모는 훨씬 축소된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를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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