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나는 백제정벌전 신라군 총사령관 김유신이 어떤 전략으로 황산벌 계백군을 돌파했는지, 그 저력 중 하나로 피붙이를 먼저 희생함으로써 군사를 격발하는 전법을 썼다고 했거니와, 이게 쇼였을까? 백제의 명운을 결정한 이 전투에서 난관에 봉착한 김유신은 당시 수하에 있던 신라군 5만명 중 자신과 가장 가까운 혈육으로 사위이자 조카인 김반굴을 희생했다. 이 김반굴은 친동생 김흠순 아들로 관창에 앞서 백제군 진지에 혼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다.
김반굴은 김흠순 셋째아들이다. 그의 다른 아들들이 당시의 권력자 중 한 명이요 떼부자인 렴장廉長의 딸들을 맞아들인 데 비해 유독 반굴만큼은 큰아버지 김유신의 네 딸 중 령광令光을 아내로 맞아들이니 이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령윤令胤이다.
이때 김유신한테는 아들 삼광三光이 있었다. 하지만 김삼광은 이 무렵 백제 정벌전에 참전해 공동 전선을 형성키로 한 소정방의 당군 영접 일을 하고 있었다. 김삼광은 운이 참말로 좋았다. 황산벌 전쟁에 참전했더라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나가서 죽으라는 아버지 명령으로 말이다.
김유신은 자신한테 가장 가까운 혈육을 솔선수범해서 희생함으로써 다른 희생을 요구했다. 부사령관 중 김품일은 아들을 내어 놓아야 했으니, 그가 바로 관창이다. 이런 친구들을 눈앞에서 희생케 함으로써 그는 군사들한테 격발을 요구했다. 이 전법은 성공해 마침내 신라군은 백제군을 몰살하고는 사비로 진격해 700년 백제 종묘사직에 종언을 고하게 한다.
김유신은 장가를 두 번 갔다. 그는 당시로서는 79세로 기록적인 장수를 했다. 조강지처는 18세 때인 건복建福 29년 임신壬申(612)에 맞은 미실美室의 손녀이자 하종夏宗의 딸인 령모令毛다. 이 사이에서 둔 아들이 삼광이다. 하지만 영모가 죽자 후처를 맞이하니, 그가 바로 태종무열왕과 문명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지조智照다. 문명이란 곧 문희文姬이니, 김유신의 여동생이다. 이 혼인에 얽힌 이야기는 너무나도 유명하니 중언은 피한다.
《삼국사기》 신라 태종무열왕본기에 의하면, 그 2년(655) 겨울 10월에 지조智照를 대각찬大角飡 유신에게 시집보냈다 했으니, 이때가 김유신이 정확히 만 60세가 된 무렵이라, 나는 한때 이를 김춘추가 김유신에게 보낸 환갑 선물로 보았지만, 따져보니 이때는 환갑이란 개념 자체가 없을 때일 가능성이 커서, 환갑 운운한 견해는 철회하기도 했다.
이런 김유신이 조카이기도 한 아주 젊은, 혹은 아주 어린신부를 맞아 노익장을 과시하게 되는데, 우리가 아는 자식들을 줄줄이 사탕처럼 까게 된다. 저 유명한 원술元述을 필두로 기라성을 방불하는 아들들을 두게 된다.
먼저 세상을 등진 조강지처 령모한테서는 아들 김삼광을 비롯해 네 딸을 두게 되거니와, 개중 한 명이 바로 김흠순의 아들 령윤과 배필로 지어지니, 사촌간 결혼이었다.
뭐 남자야 폐경과 더불어 생산력을 상실하는 여성과는 달리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있을 때까지 사내구실 하려 한다지만, 생평을 전장에서 보낸 김유신은 체력이 남달랐던지, 참말로 무한생식력을 자랑했으니, 늙을수록 번식에의 욕망은 분출했다.
그런 그의 자식들한테 무척이나 다행인 점은 아버지는 어린나이에 잃을지는 몰라도, 집안이 빵빵하기 짝이 없는 금수저라는 사실이었으니, 아버지가 있건 없건,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엄마가 시퍼렇게 살아있었고, 그 엄마는 공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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