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족보에서 서자를 족보에 아무 표식도 없이 실어주기 시작한 건
대체로 일제시대부터다.
19세기까지도 족보에는
서자는 이름을 올리지 않거나
아니면 올리되 서자라고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따라서 19세기 초반이나 18세기 족보까지만 거슬러 올라가도
최소한 족보에서 적자인지 서자인지는 구분 가능한 경우가 많다.
이건 왕실족보라고 해도 틀리지 않아서
선원계보 등을 보면 알뜰하게 서자는 서자라고 전부 마킹해 놓았다.
각설하고-.
잘 알다시피 조선시대 서자는 음으로 양으로 제약이 많아
과거 응시자체를 막거나 아니면 합법적으로 허통되어 과거를 보더라도
덜컥 장원이 되어버리면 그 자리에서 끌어내려져 적자 출신에게 장원자리를 양보하는 경우도 기록에 보인다.
어쨌건 과거에 응시하게 해준 것만 해도 고마운 일로
무과가 아니라면 문과는 서자의 응시는 원천적으로 막혀 있었다고 봐도 되겠다.
이렇게 서얼이라면 당연히 에잇 더럽다 다 때려 치우고 문중을 떠날 것 같지만
대부분의 서얼들은 그렇게 하지 않은바 그 이유는
서얼이라도 양반은 양반이라 호적에 양반 직역이라도 적어 두고
낮은 벼슬자리라도 하나 얻으려면 향촌의 경우 문중의 백그라운드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이다.
18-19세기가 되면 선대에 과거 급제자도 없이 몇 대를 쭉 내려가는 양반 후손들이 무더기로 나오는데
이들이 그렇게 6-7대를 내려가면서도 양반 직역을 종내 상실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향촌의 자기 문중 백그라운드 때문이다.
적자 집안에서도 아예 얼자라면 모를까(이들은 주인집 노비로 호적에 오른다)
서자라면 어쩄든 호적에 주호로 등재가 되니
이들이 너무 아래로 쳐져 평민 직역까지 굴러 떨어지는 것은 어느 정도 집안 체면을 생각해서
적극적으로 막았던 것이 아닌가 싶은 정황이 있다.
이 때문에 18-19세기에는 향촌에 무수히 많은 6-7대가 벼슬 없이 이어지는 양반 직역의 "몰락양반" 내지는 "잔반"들이 나오는 바,
이들이 그럼에도 19세기 말까지 양반 직역을 끝내 지켜낸 가장 큰 이유는
향촌사회의 직역이 개인에 따라 부과된 것이 아니라 문중 눈치를 보고 부여된 측면이 컸기 때문이었다 본다.
결국 서자는 문중에 붙어 있자니 여러 치사한 면이 많았겠지만
거기를 벗어나서는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 버리니
자존심 뭉개고라도 붙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조선시대-.
필자는 19세기 유학 중에는 서자의 후손도 있겠지만 이들은 향촌사회에서 그다지 반항적이지 않았을 것이라 보는 것은 이런 이유로,
실제로 19세기 후반이 되면 조선사회를 격동으로 몰아 넣은 것은 양반 끄트머리로 위에서 굴러떨어진 사람들 보다는
아래에서 치고 올라간 이들,
평민, 천민 출신의 모칭 유학들-.
이들이 변혁의 주체가 되었을 것이라 본다.
아무것도 잃을 것이 없는 이들이 가장 무서운 법이다.
이들이 바로 허균이 말한 "호민豪民"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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