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土方歳三 히지가타 도시조
앞에서 썼지만 이 사람 행적을 보기로 한다.
이 사람은 요즘 하도 일본 애니메이션과 사극 등에 자주 나와
폼나는 사무라이로 알려져 있지만
출신을 보면 이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원래 집안은 농민 출신으로
그 앞에 형제 아홉이 있었는데
아기 때 죽은 형제를 빼면 여섯 번째였다고 한다.
농민 중에서는 좀 사는 집안이었다고 하는데
그래봐야 농민이라 막말에 정치적으로는 출신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다 하겠다.
신센구미에 들어가기 전에는 원래 옷집 점원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별 성과 없이 나중에는 약을 팔러 다니기도 했던 모양이다.
나이 스물네살이 되어서야 제대로 된 검술 수련을 시작했는데
그 도장 주인이 나중에 신센구미 국장이 되는 곤도 이사미近藤勇(1834~1868)라
그와 함께 생사고락을 같이하게 되었다.
막말의 광풍이 시작되자 신센구미 부국장이 되었는데
이 패거리의 굵직한 사건에는 모두 관여하여 이름을 높였다.
나중에 메이지유신이 일어나 신정부군과 막부사이에 보신전쟁이 일어나자
막부편에 서서 끝까지 싸우게 되었다.
당시 막부는 이미 전쟁 중 이탈하여 도망가고
막부 편에 섰던 몇몇 동북쪽 번들과 사무라이들만 남아 계속 밀리며 싸웠는데
히지가타 도시조는 이들과 함께 북해도까지 들어가 최후의 일전을 했다.
북해도로 철수한 막부군은 현지에서 나라를 세우는데,
이것이 일본 최초이자 최후인 공화국으로 이를 "에조공화국"이라 부른다.
히지가타 도시조는 이 에조공화국의
"육군장관대리陸軍奉行並"로 선출되었는데
신정부군이 마침내 북해도까지 철수하여 밀어닥치자
최후의 전쟁에서 총탄에 맞아 절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북해도에서의 마지막 전쟁을 일본사에서는 하코다테 전쟁箱館戦争(1868~1869)이라 부르는데
실제로 이 하코다테 전쟁에는 극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고급 사무라이는 거의 참전하지 않았고,
참전하더라도 나중에 사면되어 복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전쟁에서 끝까지 싸우다 죽은 이들은 히지가타 도시조와 같은 미천한 출신 검객들이나 하층 무사들로
에도막부 260년간 배양했다는 사무라이 정신의 정화는 결국 이런 농민 출신이나 하급 무사들에만 남아 있던 셈이 되겠다.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 노년의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에도 막부 최후의 전쟁 (1) (0) | 2025.12.13 |
|---|---|
| 제대로 된 사무라이가 없는 신센구미新選組 (0) | 2025.12.13 |
| 서자는 왜 문중을 떠나지 않는가 (0) | 2025.12.13 |
| 절대반지의 위험 (0) | 2025.12.12 |
| 신석기시대 보그바디에 대해 (0) | 2025.12.1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