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분지 서쪽에 똬리를 튼 선도산仙桃山은 이미 신라시대에 수도 계림의 서악西岳이라, 그만큼 신성한 산으로 간주되었거니와, 이를 웅변하듯 이곳에는 태종무열왕릉을 비롯해 중고시대 왕가의 공동묘지인 신성구역이었다. 그 정상에는 문화재 지정명칭이 경주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慶州西岳洞磨崖如來三尊立像이라는 신라시대 마애불상이 있거니와
선도산 꼭대기 큰 암벽에 새긴 높이 7m에 달하는 아미타여래입상을 가운데다 박고 그 왼쪽에 관음보살, 오른쪽에 대세지보살상을 조각했으니, 7세기 중엽 작품이라 간주한다.
천수백년을 지탱해 오늘에 이르는 그 생명력이 놀랍기는 하지만 지금도 곳곳에 생채기 흔적이 완연하다. 천사백년을 버틴 이 마애불이 하마터면 우리시대에 몽땅 타버릴 뻔한 일이 근자에 있었다.
겨울이 끝자락으로 향하기 시작한 1997년 2월 9일 오전 11시 무렵, 서악동 무열왕릉 뒤편 선도산에서 불이 붙어 정상을 향해 치솟아 올랐다. 불은 임야 1.5㏊를 태우고는 대략 세시간여만에 진화되었으니, 이를 위해 공무원 등 600여 명과 헬기 2대가 동원됐다.
불을 한번 만난 산이나 숲이 그 상처를 얼마나 오래 물고 가는지는 바로 앞 사진이 증언하거니와, 그때 상처가 10년이 훌쩍 지나서도 이렇다. 자연사 했더라면 그냥 나무가 썩어버렸을 테지만, 불을 만나 좀더 오래간다.
불이 나자 온통 관심은 그 정상 마애불에 갔다.
바위가, 돌덩이가 산불이 난다 한들 무에 상관이 있으랴 하겠지만 모르는 소리다. 돌이 얼마나 불에 잘 타나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다. 특히 화강암은 불에는 쥐약이라, 불을 만나면 탁탁 하는 소리를 내면서 튀어버리고 타버리며 종국에는 식고 나서는 푸석푸석 가루로 변해버리고 만다.
선도산 마애불은 화강암은 아닌 것으로 알지만, 저거 불 한 번 제대로 만나면 그냥 나가 떨어진다. 성할 수가 없는 노릇이다.
활활 정상으로 치닫는 불길을 바라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사람이 많았다. 개중에 경주지역 터줏대감과 같은 이근직이 있었다. 나중에 경주대 교수로 부임하지만, 그때는 아마 같은 경주대 겸임교수였다고 기억하기니와, 불길을 보자마자 문화재청과 소방서에다가 긴급 전화를 넣고 난리를 쳤다. 불상을 구해야 한다고 소란을 쳤다.
이를 접한 소방 당국에서는 헬기가 연신 물을 선도산 정상에 쏟아부었다. 물대포를 쏘아댄 것인데, 그때 산불 상흔이 완연한 선도산을 올라보면, 정상 바로 밑에까지 불길이 치고 오른 흔적을 본다. 산불은 그 턱밑에서 주저 앉은 것이며, 그래서 마애불은 화마를 피했던 것이다.
얼마 뒤 이근직과 오세윤이 선도산 정상으로 올랐는데, 이 마애불을 주불처럼 봉안하는 비스무리한 점집 겸 암자가 있어 이름이 성모사인가 하는데 그 보살님이 그러더란다. "부처님 가피로 불길을 피했다"고.
돌이 얼마나 불길에 취약한지는 2005년 식목일 발생한 강원도 산불이 낙산사에 미친 영향을 보면 잘 안다. 건물이야 몽땅 타다시피 한 것은 차치하고 그 돌탑이 화강암제인데, 그만 불을 먹어 뒤쪽이 날아가고 말았다.
벌겋게 불길을 먹은 돌에가다 물을 끼얹는 일은 자살행위다. 그건 폭탄이다.
그렇게 선도산 마애불을 지킨 이근직은 이제 가고 없다. 그가 그렇게 지켜낸 마애불만 남고 정작 그는 갔다.
어제 그제, 그리고 간밤에 안동을 들이친 산불이 병산서원 낙동강 건너편까지 덮쳤다. 호시탐탐 침투를 노리는 강건너 불과 사투를 벌인 사람들이 있다. 문화재청과 안동시, 그리고 문화재지킴이 등등이 밤을 새워가며 사투를 벌이며 병산서원을 지켰다. 스프링쿨러를 계속 틀고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안동산불을 보면서 문득문득 이근직 형이 왔다갔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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