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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훈의 사람, 질병, 그리고 역사

선우씨鮮于氏 이야기 (5): 한국의 경우

by 초야잠필 2023. 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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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중국의 선우씨에 대해 장황하게 썼다. 이들의 연원이 매우 깊어 빠르게는 전한 한무제때 기록에 나타나며 매우 이른 시기부터 자신들은 기자의 후손이라는 의식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정작 한국의 선우씨 일족은 앞에서 이야기한 여러 가지 중국 쪽의 전승-기록들을 거의 모르고 있었던 것같다.  

 

한국의 선우씨 족보에 따르면 이들 역시 기자후손을 자처했지만 중간에 세계를 잃어버려 고려 문종 때 중서주서中書注書를 지낸 선우정鮮于靖을 1세조로 하는 모양이다. 

 

따라서 기자의 후손이라는 기억만 희미하게 남은 상태에서 고려 전기의 조상만 기억하고 있는 상태가 한국의 선우씨의 상황이었겠다. 

 

이들이 조선시대에 들어와 일약 조명을 받게 되었는데 다름 아니라 평양에 기자의 국가사전인 숭인전이 세워지면서부터이다. 

숭인전은 조선시대에 이전왕조의 시조를 제사하던 국가사전으로서의 소위 "팔전"의 하나로 평양에 있었다. 

 

 
조선의 팔전. 국가가 관리하는 이전 왕조의 시조에 대한 제사로 동국통감의 정통론적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

 

이때 숭인전을 세우면서 봉사손 전감을 선우씨로 임명하게 되었는데 왜 선우씨 문중의 인물을 전감으로 정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따져보면 여러가지 있겠지만 김시양(金時讓, 1581년 ~ 1643년)의 하담파적록을 보면 아래와 같이 쓰여있다. 

 

平壤舊有箕子殿。監司差出參奉以守之。所謂殿參奉也。光海癸丑。鄭賜湖爲監司時。改號箕子殿爲崇仁殿。以關西人鮮于姓者。爲箕子後。拜崇仁監奉其祀。秩正六品。蓋倣麻田崇義監例也。以鮮于爲箕子後者。取蘇東坡贈鮮于侁詩。及趙孟頫題鮮于樞書序。稱其爲箕子後之語。蓋亦微矣。丁卯之亂崇仁監鮮于洽。降于虜。朝廷論其罪削奪其職。命該道更擇鮮于姓者爲監。余爲監司以泰川人鮮于慶。奏聞于朝廷。朝廷命詳査其嫡支。余復奏曰遙遙華胄孰能卞其源委。只以姓鮮于。故膺朝旨耳。遂爲監。以箕子殿爲崇仁殿。以鮮于姓爲監者。皆是光海亂政。相率而爲僞者也。反正之初。卽當革罷。仍復 祖宗之舊典。而至今仍循。良可歎也。

 

약술하면, 

(1) 평양에는 옛날부터 기자전이 있어서 참봉을 뽑아 지키게 하였다. 이를 소위 "전참봉"이라 하였다. 

(2) 광해군때에 기자전을 숭인전으로 바꾸고 선우씨를 기자의 후예로 삼아 숭인감으로 이를 봉사하게하였다. 

(3) 선우씨로 기자의 후손을 삼은것은 소동파나 조맹부의 글에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이라고 하였던 것에 근거한 것인데 김시양의 입장에서는 이 근거가 마땅치 않았나 보다 (稱其爲箕子後之語。蓋亦微矣)。
 

(4) 김시양은 자신이 감사일때 선우씨 중에서 숭인전 전감을 뽑아 추천한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 자신 그렇게 추천하면서도 마땅치 않았던 모양으로 이는 광해군때의 어지러운 정치의 결과이니 혁파해야 한다고 까지 하고 있다. 김시양은 적어도 그의 글만을 놓고 판단하건데 우리나라 선우씨가 기자의 후손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던 셈이다. 

 

김시양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선우씨 일문이 어떻게 반박을 했는지는 알수 없다. 다만 1895년 편찬된 "조선역대사략"이라는 글에는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按箕準借地衛滿 旣失其國 其後孫又借地溫祚 竟至敗望 養虎遺患 後不徵前 遂使仁賢之祀忽諸 惜哉 又考李廷龜箕子崇仁殿碑 略曰 末有孱孫三人 曰親其後爲韓氏 曰平爲奇氏 曰諒入龍岡烏石山以傳鮮于世系 韻書曰 鮮于子姓 周封箕子于朝鮮 支子仲食采於于 因氏鮮于 綱目稱 箕子封於朝鮮 其子食采於于 因姓鮮于 趙孟頫贈鮮于樞詩曰 箕子之後多髥翁 鮮于之爲箕子後 不旣章明較著乎 洪武間 有鮮于景者 爲中領別將 其七代孫寔 自泰川來居殿側 遂以寔爲箕子後 揭殿號曰崇仁 拜寔爲殿監 子孫世受云 此係箕子後事 且關我朝崇奉之義 故幷錄之

 

아마 이 글이 조선시대의 선우씨에 대한 공식적인 주장을 반영한다고 보는데 요약하면, 

(1) 기자의 후손은 한씨, 기씨, 선우씨이다. (중국에 없는 기록)

(2) 이 중 선우씨는 기자가 조선에 피봉되고 그 아들 중이 우에 식읍을 얻어 한글자씩 따서 선우라 하였다 (이는 중국과 기록이 같다)

(3) 조맹부의 시에 선우씨가 기자라는 주장이 있다. 

(4) 홍무연간에 선우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7대선 선우식을 기자의 후예로 삼고 숭인전이라고 하였다. 

 

대개 한국의 선우씨 족보에 실린 내용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요약하면, 한국의 선우씨 역시 기자 후손이라는 의식은 있었지만, 중국 쪽 전승과 비슷한 것도 있고 비슷하지 않은 것도 있는 상태에서 조선시대까지 내려왔다는 점이다. 세계를 잃어 고려 전기 이전 기록은 전혀 없었다. 

 

중국 쪽에서는 선우씨와 기자, 그리고 조선에 대한 이야기가 이것저것 2000년 전부터 계속 전해 내려오고 있었지만 정작 한국 쪽 선우씨에서는 기자의 후손, 조선과의 관련 외에는 세계가 뚜렷하지 않아 잘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내려오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선우씨 일족은 조맹부 시에 선우씨가 나오므로 중국에 같은 선우씨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겠지만, 아마 같은 기자의 후손으로 언제인지 알지 못하는 시기에 중국으로 귀환한 일족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선우씨의 본류는 이쪽으로 중국의 선우씨는 여기서 갈려나갔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바다 건너 저쪽의 사정이라 사실 그다지 흥미가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북한에 남아 있다는 숭인전. 숭인전과 세트가 되어 관리되던 기자릉은 없애 버렸다던데 숭인전은 다행히 남아 있다.
 
P.S.) 조선시대 숭인전과 선우씨에 대해서는 아래 정용건 선생의 글에 자세하다. 
 
 
https://www.itkc.or.kr/bbs/boardView.do?id=75&bIdx=228330&menuId=125&bc=6&bcIdx=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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