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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당탕 서현이의 문화유산 답사기

성남 갈현동사지 유적, 또다른 가능성에 대해

by 서현99 2023. 7.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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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성남 갈현동사지 발굴조사 성과가 매우 뜨거웠다!

어마무시한 유적이 발굴되었다는 소식은 이미 전해들었지만, 기사를 통해 접한 성과는 매우 놀라웠다.
 
2023.07.26 - [NEWS & THESIS] - 성남 갈현동 갈마치 골짜기에서 출현한 조선전기 거대 사찰(유적 브로셔 첨부하니 다운로드하시오)

성남 갈현동 갈마치 골짜기에서 출현한 조선전기 거대 사찰(유적 브로셔 첨부하니 다운로드하시

이 소식은 그저께 요로를 통해 들어왔으니, 골자를 추리자면 성남시 중원구 갈현동 469-1번지 일원에서 조선시대 전기(1392~1506년)에 만든 것으로 생각하는 왕실 원찰급 규모 거대 사찰 흔적이 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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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사단 설명은 출토 유물로 비추어 봤을 때 이곳은 조선전기 왕실 관련 원찰일 것으로 판단하였지만, 

누구의 원찰인지가 기록이나 다른 자료를 통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 범자문 막새와 만자문 기와, 연화문 막새 등이 출토되어 사찰일 가능성이 있지만, 불상이나 석탑 등 사찰에서 보여지는 다른 조형물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사찰이 아니라 역원의 기능을 한 복합시설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2023.07.26 - [NEWS & THESIS] - 성남 갈현동 절터, 세곡동 유적과 회암사지의 총합

성남 갈현동 절터, 세곡동 유적과 회암사지의 총합

성남시 의뢰로 중앙문화재연구원이 한 건 한 성남 갈현동 사지寺址는 실상 딱 절터만인가 하는 논란은 있을 수 있다. 이를 초보 검토한 어느 지인의 말대로 절이었을 수는 있으나 시종 절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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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현장을 다녀오신 분들의 생생한 사진과 후기를 보고, 잠시 짬을 내어 다녀왔는데, 

몇 가지 의문이 들었다.

갈현동 발굴조사 현장




우선 조선 초기 대표적인 왕실 사찰인 회암사지에 버금가는 용두, 취두, 잡상, 청기와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원찰이라는 기록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궁궐에서나 사용할 법한 초특급 유물들인데, 이곳이 왕실 관련 원찰이었다면 왜 아무런 기록이 확인되지 않는 것인지가 가장 의문이었다. 물론 이러한 의문은 다른 사람들도 갖는 기본적인 의문이다.



 
두번째, 회암사지 출토 유물과 유사하고 이를 기반으로 왕실 관련 원찰로 추정했는데, 회암사지와 건축기법에서 확연히 차이가 보인다는 점이다.

추정 금당지 석축
추정 금당지 동쪽 확장 건물의 계단
추정 금당지 내부 초석과 뒤편 석축



회암사지는 기본적으로 잘 가공한 장대석을 사용하여 정연한 석축을 조성하였고, 계단 소맷돌에서도 궁궐 건축과 유사성이 보이는 등 사찰이지만 궁궐에 가까운 건축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3단 동쪽 건물지 일부에서만 정연하게 치석한 석재를 사용하였다.



반면 갈현동사지는 3단 동쪽건물의 극히 일부에서만 정연하게 가공한 판석을 사용한 것이 확인되고 있다. 유물은 회암사지와 같은 왕실 궁궐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대지를 조성하고 석축을 쌓는 기법은 기존 왕실 원찰과 매우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2단지 축대와 계단과 그 앞에 깔린 박석


 
세번째, 사찰 건축은 기본적으로 축선을 매우 중요시한다. 1단에서 2단으로 올라가 중정을 지나면 금당이 나오는데, 금당지 석축에는 전면 계단이 없다.

좌우로 확장된 건물에서 계단이 확인되고 있는데, 금당 측면도 아니고, 금당에 붙은 건물의 석축 계단을 통해 금당으로 들어가는 동선도 일반적인 사찰의 축선과 건물배치와도 차이를 보이고 있다.


 
네번째,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사찰이 폐사되는 경우는 산사태, 수해 그리고 전쟁이나 기타 다른 이유로 인한 화재에 의해서가 가장 많다. 그런데 이곳은 수해나 화재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고, 건물이 그대로 뒤로 무너진 흔적이 확인되었다.

3단 건물지와 석축 사이에서 용두와 잡상 등 기와와 건물 지붕에 올리는 부재들이 집중 출토되었다.

조사단은 사람이 살다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전부 빠져나가서 자연스럽게 건물이 관리되지 않아 주저 앉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조사단에서는 여러 자료를 통해 왕실 원찰로 추정했지만, 사실 출토 유물 이외에는 뚜렷한 기록도 없고, 사찰이었음을 명확히 해줄 수 있는 근거는 좀 빈약하다.

범자문 막새들
연화문 막새



그렇다면 적어도 조선시대에는 이곳이 사찰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물론 3단의 금당지로 추정한 석축의 하부로 선대 유구로 추정되는 초석이 물려들어가고 있고 아직 미조사된 구역들도 있으므로 추가조사를 통해 좀더 성격을 명확히 파악해봐야 겠지만, 현재 단계에서는 최후 사용이 사찰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염두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면 조선전기에 궁궐건축에 쓰이는 각종 용두와 취두, 잡상 등을 건물에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당연히 왕실 종친이나 왕실 관련 사람이었을 것이다.

회암사가 태종, 세종, 효령대군 등 조선전기에 여러 차례 중창되었고, 이와 유사한 유물이 출토된 점으로 미루어 조사단에서도 조선전기 왕실 관련 사찰로 추정하였지만, 사찰이 아니라는 가정을 한다면, 왕실 종친이 머물렀던 곳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사람이 태종의 맏아들이자 세종의 형인 양녕대군이다.

태종 18년 양녕대군은 폐세자되고 충녕대군이 세자에 책봉된 후, 광주(廣州)에 있는 사저로 내려간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6일 을유 2번째기사에 의하면,

양녕대군이 동대문을 지나 광나루에서 배를 타고 광주(廣州)로 내려갔다고 전하고 있다. 

"양녕(讓寧)이 동대문(東大門)에 이르러 신에게 묻기를, ‘경은 무슨 일로 오는가?’하므로, 대답하기를, ‘호송(護送)입니다.’하였습니다. 양녕이 또 말하기를, ‘이 땅을 다시 볼 길이 없을 것이다. 아아!’하고, 또 광나루[廣津]에 이르러 배를 타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또 작별할 때에 신에게 말하기를, ‘내가 성질이 본래 거칠고 사나와 보통 때에 나아가 뵈올 적에 말이 반드시 불공(不恭)하였다. 이제 이에 다시 상서(上書)한 글을 보니, 불공(不恭)하기가 이와 같았다. 죄가 심하였으나 죽지 않은 것은 주상의 덕택이니, 어떻게 보답하고 사례하겠는가? 내 성질이 겁약(㤼弱)하기 때문에 짐작(斟酌)을 잘못하여 자주 불효(不孝)를 범하였으니, 어찌 성상을 보기를 기약하겠는가?’하였습니다. 그 시비(侍婢) 13인은 나라에서 정한 숫자인데, 소아(小兒)로서 더 따라가는 자가 2인이었으므로, 신이 사계(四季) 등 2인을 빼앗아 한경(漢京)으로 보냈습니다."

하니, 임금이,

"2인은 모두 그 첩인데, 경이 빼앗은 것은 잘못이다."

하고, 즉시 명하여 광주(廣州)로 보내게 하였다.

(태종실록 35권, 태종 18년 6월 6일 을유 2번째기사)
 
이후 태종과 세종은 자주 양녕을 불러서 만났으며, 노비, 술, 고기 등 필요한 것을 계속해서 지원해주었고, 

신하들이 양녕을 가까이 두지 말고 궁벽한 곳으로 보내라고 해도 태종이 광주로 내려가거나, 양녕을 불러올리는 등 자주 만난다.

그리고 세종 1년, 이천에 새로 양녕의 집을 지어주기로 한다. 

경기 감사 조치(曹致)를 불러서 명하기를,
"양녕의 제택(第宅)을 이천(利川)에 영건(營建)하되 40간이 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세종실록 6권, 세종 1년 12월 16일 병술 2번째기사)
 
마침내 세종 2년에 양녕은 이천으로 이사하게 된다.

양녕을 이천(利川) 새집에 옮겨 안치하고 토지를 주어 농사짓게 하고, 또 녹봉을 그 고을에 주게 하였다.
(세종실록 7권, 세종 2년 3월 10일 무인 2번째기사)
 
이를 정리하면, 

1. 양녕대군의 사저가 광주(廣州)에 있었다.(성남은 조선시대 광주목에 해당하였다.)
2. 양녕대군은 폐세자 후 광주에서 내려와 살다가 1년 후 이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3. 궁궐건축에서나 쓰이는 용두, 취두, 잡상 등 고급 유물이 확인되었다는 점에서 왕실 종친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4. 발굴조사 결과 갑자기 집을 비워 건물이 무너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5. 사찰건축이라고 하기엔 뭔가 석연치 않은 건축기법과 건물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아직까지 명확하지 않지만, 열린 가능성으로 약간의 상상을 해본다면, 어쩌면 이곳은 사찰이기보다 조선전기 왕실 종친(양녕대군으로 추정)의 사저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물론 이곳에서 범자문, 연화문 막새가 출토되었으므로 불교의 색채가 농후한 것은 틀림없다. 오히려 회암사는 사찰이지만 궁궐에 버금가는 건축기법과 기능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반대의 경우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추가조사와 좀더 다양한 검토가 필요하겠지만, 이러한 가능성도 열어두고 해석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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