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사마르칸트!😃
사마르칸트는 우즈베키스탄 제2의 도시답게 도로도 넓고, 거리도 깨끗하며, 세련된 건물도 많고, 사람들도 많았다.
사마르칸트에서 숙소를 어느 쪽에 잡는지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나의 경우는 아프라시압 서쪽에 숙소를 잡고 울루그벡 천문대까지만 택시를 타고 이동 후 레기스탄, 구르 아미르 영묘까지 쭉 걸어다녔다.
물론 더운 날씨에 걷는 일이 힘들긴 하지만, 잦은 택시 승하차가 오히려 불편하기도 하고, 또 이럴 때 아니면 또 언제 사마르칸트를 걸어서 누비고 다녀보겠냐는 생각도 있었다.😁
울루그벡은 이전 답사기에서도 몇 번 소개했지만, 아미르 티무르 황제의 손자로 사마르칸트 황금기를 지배한 위대한 황제이자 천문학, 수학, 역사학 등 학문에도 뛰어난 학자였다.
울루그벡 천문대(Ulughbek's Observatory)는 아프라시압 언덕에서 북동쪽으로 약 1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기초만 남은 것이고 원래는 높이가 40m에 달하는 거대한 천문대였다고 한다.
이곳에서의 관측을 바탕으로 울루그벡은 항성시 1년간을 365일 6시간 10분 8초로 추측했다. 이는 오늘날의 정밀기기로 계산한 365일 6시간 9분 9.6초에서 오차가 1분도 채 되지 않는다고 하니, 놀라울 따름이다.
한편, 울루그벡의 천문표는 조선왕조 세종 때 회회력(이슬람 역법)으로 알려져 이순지, 장영실 등에 의해 '칠정산내외편' 등을 만드는 기초가 되어 조선의 역법을 발전시켰다고 하는데, 전시실 내부 패널에 간단히 설명되어 있다. 아마도 울루그벡은 우즈베키스탄의 세종대왕 같은 분이었던 것 같다.
울루그벡 천문대에서 15분 정도 걸으면 아프라시압 언덕을 만난다.
이곳은 13세기 징기스칸 침략으로 도시 전체가 폐허로 변해버렸다고 한다.
아프라시압은 1958년 한 목동이 우연히 이곳에서 땅을 파다 동전을 비롯한 옛 유물들이 발견되어 본격적으로 발굴을 시작하였다.
발굴 조사 결과에 따르면, 11개 문화층이 확인되었으며, 깊이는 20m, 면적은 219헥타르에 달한다고 한다.
당시의 많은 여행객과 학자가 남은 기록에 의하면 '마라칸다(사마르칸트의 옛 명칭)는 모든 도로가 포장이 되어져 있었고, 수도시설이 각 가정으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실크로드의 오아시스로써 신비로운 물자와 상인들로 풍요로운 도시였던 것이다.
징기스칸의 침략으로 폐허가 된 후 150년이 지나 아미르 티무르가 이곳 남쪽 아래 지역을 제국의 수도로 삼고 대대적인 개발을 시작함으로써 현재의 사마르칸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서벽에 그려진 그림 때문이다. 서벽에는 7세기 당시 이곳의 지배자를 접견하기 위해 많은 나라에서 온 사절단이 그려져 있는데, 왼쪽부터 차가니안, 차치, 당, 티벳, 튀르크, 고구려 순으로 추정된다.
이 아프라시압 벽화에 고구려 사신이 나오는 것을 국사 교과서에서 배웠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마 당시에 고구려가 그만큼 국제적인 나라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자료로서 배웠던 것 같다.
최근에는 우리나라 동북아역사재단에서 문화 ODA 사업의 일환으로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에 대한 디지털라이징과 복원을 실시하였고, 현재 아프라시압박물관 영상실에서 상영되고 있다.
https://youtu.be/AWEYXAsaBf4
박물관을 나와서 아프라시압 언덕에 올라가 보았다. 박물관 쪽에서 올라가보니 그냥 메마른 언덕이지만, 북쪽에는 유적이 남아 있다고 한다.
아프리사압 언덕을 관통하는 도로를 따라 걸어 내려오면, 앞쪽으로 거대한 비비하눔 모스크가 눈 앞에 펼쳐지고 그 앞에는 사마르칸트에서 제일 큰 재래시장이라는 시압 바자르가 보인다.
비비하눔으로 가기 전에 왼쪽으로 10분 정도 내려가면 아프라시압 언덕 남쪽에 형성된 공동묘지를 지나 샤히진다(Shah-i-Zinda)에 도착한다.
샤히진다는 사마르칸트 제일의 이슬람 성지로서 이슬람 종교지도자, 순교자를 비롯하여 티무르 왕족 사람들의 영묘가 총길이 200미터, 폭 40미터의 규모의 일직선으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건축물을 하나하나 소개하긴 어렵고, 한 가지 느낀 점은 각 영묘마다 타일 장식 문양과 색채가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답사를 다니는 동안 본 여러 모스크의 타일 장식이 약간씩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특히 이곳은 많은 영묘 건물을 볼 수 있어서 타일 장식의 문양을 구성하는 방법과 타일을 붙이는 방식에서 차이가 있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차이가 시기의 차이인지 기법상의 차이인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많은 수의 타일을 붙여 문양을 이루던 방식에서, 하나의 타일에 원하는 문양을 그려 넣어서 타일을 붙여 문양을 장식하는 방식으로 흘러간 것이 아닌가 생각됐다.
(시압바자르를 잠깐 구경했는데, 부하라에서 보던 시장 모습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라면 사마르칸트가 외국 관광객이 더 많이 오는 곳이라서 그런지, 물건을 팔기 위해 부르는 부르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과 아이를 안고 구걸하는 난민들이 있다는 점이다.)
비비하눔 모스크(Bibi-Khanum Mosque)는 티무르 황제의 9명의 아내 중 가장 사랑한 왕비의 이름을 딴 모스크이다. 왕비 이름을 딴 건물이라고 하니 인도의 타지마할이 생각났다.
사마르칸트에서 손꼽히는 대형 모스크였으나, 1897년 지진과 사람들의 무관심 및 파괴 행위로 화려했던 건물은 만신창이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정부에 의해서 복원되었지만 원형을 잃었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바로 맞은 편에는 비비하눔의 영묘가 있는데, 규모도 작고 눈에 띄지 않아서 비비하눔만 보고 지나치기 쉽지만, 의외로 비비하눔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는 핫스팟이기도 하다.
비비하눔 모스크에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사마르칸트를 대표하는 레기스탄 광장을 만날 수 있다. 과거에는 공공의 광장으로 왕의 알현식, 공공집회 등이 열린 곳이었으며 티무르 시대에는 대규모 노천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울루그벡 시대에 처음으로 메드레세가 세워졌다고 한다.
레기스탄 광장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가진 것은 그 후 나머지 다른 2개의 메드레세가 건립된 이후이다. 3개의 메드레세가 건립된 이후 레기스탄 광장은 이슬람 교육의 중심지로서 명성이 자자하였으며, 이후 구소련 시절에는 이슬람 종교의 탄압으로 다시 거대한 노천시장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물론 지금은 이슬람 교육의 장소도 아니고, 노천시장도 아닌 세계적 관광지이자 대규모 콘서트나 행사가 열리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다.
광장은 왼쪽에 위치한 건물이 울루그벡 메드레세, 중간이 틸라카리 메드레세(1647년 건립), 오른쪽이 쉬르도르 메드레세(1636년 건립)이다.
이 쉬르도르 메드레세 입구 아치에 어린 사슴을 쫓는 사자(사자보다는 호랑이에 훨씬 가깝다)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곳을 상징하는 대표적 문양이다.
이제 사마르칸트의 마지막 코스인 구르 아미르 광장까지 왔다. 이곳은 레기스탄 광장에서 걸어서 약 10분 정도면 갈 수 있다.
구르 아미르 영묘는 아무르 티무르를 포함해 울루그벡, 울루그벡의 아버지 샤 루크 등 그의 가족이 묻혀 있는 곳이다.
내부는 매우 화려하게 장식되었으며, 내부 아치형 장식에는 히바에서 보았던 공작새 꼬리 모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영묘 가장 중앙에 있는 검은 관이 아미르 티무르의 묘이고 아래의 흰색 관은 울르그벡의 묘이다.
구르 아미르 영묘는 티무르의 무덤으로서도 의미가 있지만, 64개의 굴곡진 모양과 화려한 푸른 색채의 돔 자체로도 유명한 곳이다.
원래 티무르는 자신의 고향인 사크리스얍즈에 묻히길 원했으나 1405년 중국 원정길에서 급사하는 바람에 사마르칸트로 시신을 모셔왔지만 폭설로 인해 샤크리스얍즈로 가는 길이 막혀버려 이 곳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지난 답사기에서 샤크리스얍즈로 가는 길이 산을 넘는 매우 험한 길이었던 걸 생각하면 이해가 된다.)
일찍부터 움직인 덕분에 사마르칸트 첫 날 볼 수 있는 유적지는 거의 다 본 셈이다. 다음 날은 기차 시간이 애매하기도 하고, 전 날 많이 걸은 탓에 반나절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다가 기차를 타고 마지막 도시인 타슈켄트로 이동했다.
이제 마지막 도시, 타슈켄트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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