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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철의 잡동산이雜同散異

세검정洗劍亭, 그 내력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6.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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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검정]

세검정은 인조반정 후 칼을 씻어서 세검정이라고 한다는 설도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기록을 추적하면 영조 때 총융청을 신영동으로 이설할 즈음 지은 것이다.

일부 연구자 가운데 그 이전 기록에 세검정이 보인다고 그 이전에도 있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는데, 그 세검정은 함경도 삼수군(三水郡)의 세검정이다.  

영조 때 여항문인 김상채(金尙彩)는 《창암집 蒼巖集》 권2 〈세검정〉 시에서

“정묘년(1747, 영조23)에 총융청을 탕춘대 뒤로 옮겨 세우고 무진년(1748)에 새로 정자를 지었다.[丁卯 摠廳移建于蕩春臺後 戊辰新構亭也]”

고 하였으니 1748년(영조 24)에 지어졌다.


영조는 신미년(1751, 영조27) 7월 17일 비를 맞으며 세검정에 올라 시를 한 수 지어 이곳에 걸었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세검정(洗劍亭)

한북문 동쪽에 있는 자그마한 정자 하나 漢北門東一小亭
시내와 바위를 굽어보니 맑디맑은 물줄기 俯臨川石水清清
욕기 풍무하는 것이 바야흐로 내 생각이라 風舞浴沂正予意
거침없이 올라 난간에 기대어 물소리 듣네  拂衣憑檻聞流聲


신미년(1751년 영조 27) 7월 17일 비를 맞으며 올랐다. [重光協洽初秋旣既望後一日 冐雨登臨]

위 시 3행의 욕기 풍무는 《논어》 〈先進〉의 고사인 기수(沂水)에서 목욕하는 것으로, 세상사에 연연하지 않고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함을 뜻한다.

하루는 자로(子路)ㆍ증점(曾點)ㆍ염유(冉有)ㆍ공서화(公西華) 네 사람이 공자를 모시고 있었는데 공자가 “저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그 뜻을 말해 보라.”라고 하자 증점이 대답하기를 “늦은 봄날 봄옷이 지어지거든 어른 대여섯 사람, 동자 예닐곱 사람과 함께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오겠다.”라고 하니, 공자가 감탄하면서 “나는 증점을 허여한다.” 하여 그의 초연하고 대범한 기상을 인정한 일을 말한다.

영조는 증자처럼 자연 속에 유유자적하고 싶다는 뜻으로 쓴 표현이다.

이날 《승정원일기》를 보면 세검정 3글자 현판은 누구 글씨를 걸었는지 나눈 대화가 수록되어 있으니 다음과 같다.  

상이 이르기를, “세검정(洗劒亭)의 제액(題額)을, 병조 판서는 좌상 아들의 글씨라고 하였고, 판부사는 좌상의 필법이라고 했는데, 오늘 판단할 수 있겠다.”라고 하니, 도제조 김약로(金若魯)가 아뢰기를, “좌상의 아들은 글씨를 잘 쓴다고 이름나지는 않은 듯합니다.”라고 하자, 좌승지 오언유(吳彦儒)가 아뢰기를, “좌상의 아들 조재득(趙載得)이 팔분체(八分體)로 이름을 떨쳤습니다.”라고 하였다. [上曰, 洗劍亭題額, 兵判則以爲左相之子筆, 判府事則以爲左相之筆, 今日可以判斷矣。都提調金若魯曰, 左相之子, 則似無善寫名矣。彦儒曰, 左相之子趙載得, 以八分得名矣。]

이 대화를 보면 조현명(趙顯命, 1690~1752) 또는 그 아들 조재득이 쓴 현판을 걸었는데, 그 글씨는 예서체인 팔분체였던 모양이다.

사진은 옥소 권섭의 《세검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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