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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송은松隱 이병직李秉直(1896-1973)의 국화 그림

by taeshik.kim 2023.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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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을 가까이에서 섬긴 이로 유재현이란 환관이 있었다. 1884년 갑신정변때 고종을 모시고 경우궁으로 갔던 유재현은 정변 이튿날 김옥균 등에게 살해당한다. 평소 개화파와 가까웠으나 정변에 찬동치 않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그에게는 양자의 양자가 있었다. <매천야록>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의 원수' 김옥균의 시신이 서울 양화나루에 오자 직접 찾아가 간을 꺼내어 씹었다고 한다. 그가 양자로 들인 인물이 바로 이 글 주인공 송은 이병직이다. 

큰 권세와 부를 대대로 누린 환관 가문 후예가 된 이병직은 미술에 조예가 깊었다. 김첨지가 하루 종일 일해도 3원을 못 벌던 시절, 한 해 3만원 남짓한 수입이 있던 그는 돈을 아끼지 않고 우리 고미술품을 사들였다.

그렇게 구한 유물 상당수 중에는 오늘날 보물 지정된 것도 있고(<삼국유사> 같은) 박물관 대표작이 된 것도 있다(평양 조선미술박물관에 있는 김두량의 <낮잠> 같은). 또 그는 선대 유산에 경매로 유물을 보내 얻은 자금을 보태 학교를 세웠다.

오늘의 의정부고등학교인데, 이를 세우는데 40만원을 쾌척했다니 그 결단이 놀라울 정도다. 기와집 한 채가 2,000원이었고, 군수 월급이 70원 하던 때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이병직은 해강海岡 김규진(1864-1933)에게 서화를 익혀 조선미술전람회에 여러 차례 입선하고 해방 후에는 국전 초대작가와 심사위원을 역임할 정도로 실력있는 서화가였다.

오래 살아서인지 작품도 그리 드물지 않은데, 주로 사군자를 즐겨 그렸다.

그의 사군자는 대개 얌전하고 단아하다. 해강의 호쾌한 붓놀림을 사사받았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인데, 아마 그의 성격이 그래서였던지...




이 작품도 그렇게 얌전하지만, 거기 더해 섬세하다 할 정도로 꼼꼼한 필치가 돋보인다. 어디 하나 흐트러진 데가 없이 깔끔한 것이, 얼굴이 아주 희고 맑았다는 전언傳言 속 그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먹빛과 노란색을 잘 우려내어 종이에 입힌 솜씨하며, 나직하게 속삭이는 듯한 글씨의 화제畵題도 일품이다. 


가을이 따스하여 한기가 더디더니
한겨울 되자 난초가 처음 꺾이도다
국화꽃은 번잡한 녹색 사이에서
순금이 하늘 비추듯 찬란하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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