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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식민지 시절, 재在평양 일본인들의 취미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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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20년대, 평양 일대에 산재해있던 낙랑樂浪 고분 열에 아홉은 도굴꾼의 곡괭이를 피하지 못했다.

그 시절 도굴의 열기가 얼마나 거셌던지, 평양에 살던 일본인이 “1~2원을 주고 낙랑 청동거울 1점이나 토기 항아리 1점쯤 구입하지 못했다면 남한테 바보 취급을 당했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 편집자補 *** 

 

도굴은 장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근자 중국에서 발견 발굴된 조조 무덤의 경우, 삼국지 그의 본기를 보면 죽으면서 무덤은 봉분을 만들지 말고 편평하게 해서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하라 유언하는 장면이 있다. 

그만큼 도굴을 두려워한 까닭이다. 

한반도라 해서 사정이 다르지 아니해서 왕릉이 문종 이후인가? 회격묘 일색으로 변하고, 이른바 후장厚葬에서 박장薄葬으로 간 가장 큰 이유도 도굴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다만 근대가 개막하면서 사정이 좀 일변하는 측면이 있어, 이땅에 고고학과 미술사라는 학문이 본격 상륙하면서 또 다른 양상이 펼쳐진다. 그것이 바로 이른바 짜가의 등장이다. 

이 짜가 열풍도 중국은 이미 송대에 고고박물학이 흥행하면서 문제가 되기도 하지만, 한반도 사정에서 보면 유사품 제조 판매는 좀 늦은 편이다. 

구한말 이래 식민지시대가 개막하면서 도굴이 일대 광풍을 일으킨다. 이 광풍은 결국 무수한 짜가를 양산하는 빌미가 되거니와, 그 그 진원지를 평양으로 삼으며, 더 구체로는 이른바 낙랑 유물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한반도 도굴사는 내가 장대하게 펼쳐놓고 고려시대까지 써내려오다 조선시대 직전에 절필한 상태인데, 회사 그만 두면 재개하리다 다짐하지만, 이번에도 제대로 되지는 않을 것이다. 

종래에는 언론계 대선배인 이구열 선생이 비스무리한 책을 내기도 했다고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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