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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1912년 가을, 금강산에서 온 엽서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2. 11.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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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조선의 철도는 기본적으로 조선총독부 철도국 산하에 있었다(개인이 놓은 사철私鐵도 없지 않았으나). 이 시절은 지금 같은 고속도로는 물론이고 간선도로 자체가 충분치 않아서, 대량 운송에는 철도 만한 것이 없었다.

그런 만큼 철도국의 수장인 철도국 장관의 위치는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요즘으로 치면 국토교통부 장관에 맞먹는다고나 할까?

그런 지위였던 조선총독부 철도국 장관 자리에 처음으로 앉은 인물이 오야 곤페이大屋權平(1862~1924)라는 자다.

그는 1883년 도쿄대 공학과를 졸업하고 3년 뒤 철도국 기사가 된 이래 그 분야에서 승승장구했으며 구미 유학도 다녀왔다.

1903년 경부철도 공사 책임자로 부임하며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는 승진을 거듭하며 훈장도 타고, 1910년 국망 이후 철도국 장관이 된다.

그는 같은 시기 비슷한 처지의 일본인들처럼 조선 문화재 수집에 꽤 관심이 많았던지, 경부철도를 놓으며 해체된 칠곡 정도사터 오층석탑(현재 국립대구박물관 소재)을 남대문 밖 자기 관사 앞에 갖다놓고 즐겼다고 한다.

물론 이러한 행위는 그때나 지금이나 불법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오야 곤페이도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조선에 오면 오야 장관의 신세를 지곤 했던 모양이다.

때는 1912년 10월 15일, 풍악산楓嶽山 구경을 하던 그 친구 중 한 명이 엽서에 슥슥 그림을 그렸다. 그 유명한 장안사長安寺 풍경이었다.

조선 사람들이 흔히 부감법俯鑑法으로 장안사 일대를 그린 것과는 달리 이 사람은 평원시平遠視로 장안사 전경을 잡았다.

가을이라 나무 이파리가 많이 성글어진 모습을 잘 포착한 그는 엽서 뒷면에 주소와 이름을 쓰고 우표를 붙여서 우체통에 넣었다.

이때는 우편번호가 없었는지 그냥 경성 남대문 바깥 철도장관저邸 오야 곤페이 상樣이라고만 적었다.



금강산 우체통에 들어간 그 엽서는 이틀 뒤 회양淮陽 우체국에 접수되고 그 이틀 뒤 경성에 다다른다. 제법 빠른 속도다. 그리고 오야 장관 집에 배달된다.

그림 그린 이는 幹七(?)郞이라 했는데 누군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금강산을 다녀올 정도로 여유가 있었고 오야 장관과 꽤 허물없이 지낸 사이였으리라는 점만 추정할 뿐이다.

100년이 지난 지금, 엽서는 누렇게 바래 금강산 추색秋色을 더 짙게 나타낸다.


*** 편집자注 ***


저 대옥근평 大屋権平이라는 사람을 위키에서는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おおや ごんぺい、1861年4月1日(文久元年2月22日[1][2])- 1923年(大正12年)3月31日)は、日本の鉄道官僚・技師、土木技術者。工学博士、朝鮮総督府鉄道局長官。

経歴
周防国岩国藩士・大屋定保の長男として生まれる。1883年(明治16年)東京大学理学部(土木)工学科を卒業し、陸軍御用掛となる。

1886年(明治19年)10月、鉄道局に転じて鉄道技師に任じられ、横須賀線、東海道線の建設に従事した。その後、臨時鉄道隊技術部長、逓信省鉄道技監、兼鉄道作業局工務部長を歴任。1901年(明治34年)6月、鉄道事業の視察調査のため欧米に派遣され、1902年(明治35年)4月に帰国した。1901年8月、工学博士の学位を授与された。1903年(明治36年)12月に休職となる。

1903年、京釜鉄道の工事長に転じた。その後、統監府鉄道管理局技師・工務部長兼総務部長、統監府鉄道管理局長、鉄道院技監兼韓国鉄道管理局長を経て、1910年(明治43年)朝鮮総督部鉄道局長官に就任し、朝鮮半島の鉄道建設に尽力した。

1923年3月、東京府荏原郡大崎町上大崎長者丸(現東京都品川区)の自宅で療養中に死去した。

親族
妻 大屋アツ子(今井兼利陸軍少将の三女)


철도국鉄道局은 다음을 참조하라

https://www.jacar.go.jp/glossary/term2/0050-0020-0020-0010-0050.html

鉄道局|アジ歴グロッサリー

鉄道局 地域 朝鮮 都市名 京城 解説 朝鮮総督府の鉄道経営は当初、所属官署に鉄道局が設置された。国有・私設両鉄道の管理監督を担ったが 、1917年7月31日、朝鮮国有鉄道は南満洲鉄道株式

www.jacar.g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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