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일 냉수리 신라비>
포항 중성리비가 발견됨으로써 그 자리에서 밀려나기는 했지만, 울진 영일 냉수리비는 얼마전까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신라비였다. 그 건립시기가 최종 확정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해도, 서기 503년, 지증왕 4년이라고 많은 이가 받아들인다. 이 영일 냉수리비에는 신라인 이름 얼추 25명이 나온다. 과거 왕이 2명이요, 현재 살아있는 갈문왕이 1명, 기타 이 갈문왕과 더불어 진이마촌이라는 동네에서 벌어진 아마도 재산 관련 분쟁 판결에 관여한 다른 신료 6명, 그리고 아마도 이들의 부관이었을 공산이 큰 실무 관료 7명, 그리고 비문 작성에 관여했을 법한 실무관료, 그리고 진이마촌 행정책임자인 촌주 등이다.
이들 25명에게는 모두 그 주거지를 밝혀놓았다. 심지어 신라왕과 갈문왕조차도 주거지를 다 밝혀놓았다. 이에 의해 이번 재산 쟁송 판결과 관련해 그에 대한 지침 역할을 하는 율령을 공포한 바 있는 두 왕은 모두 왕경 喙部가 거주지며, 기타 共論 참가자로 沙喙部에서는 지도로至都盧 갈문왕葛文王과 무슨 덕지德智 아간지阿干支와 자숙지子宿智 거벌간지居伐干支, 喙部에서는 이부지尒夫智 일간지壹干支와 지심지只心智 거벌간지居伐干支, 本彼部에서는 두복지頭腹智 간지干支와 斯彼部에서는 모 무슨지暮智 간지干支가 있었다.
뿐인가? 아마도 이들의 부관으로서 이들이 판결을 내리기까지 실무에 관여하고, 판결 이후 그 사후 처리에 관여했을 법한 전사인(典事人) 일곱 명도 실명 거론했으니, 沙喙部에서는 일부지壹夫智 나마奈麻와 도로불到盧弗과 구수휴須仇休, 喙部에서는 탐수도사耽須道使 심자공心訾公과 같은 喙部 沙夫那利, 沙喙部■那支처럼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현재 거주지, 요즘 기준으로 치자면 주민등록상 거주지를 밝혀놓았다.
비단 이 냉수리비만이 아니라, 이 시대 거의 모든 금석문이 사람 이름 앞에는 반드시 거주지를 밝혀놓았다. 왜 그랬을까? 이런 주소지 공개를 우리는 어찌 바라봐야 하는가?
지금까지 이런 주소지 공개를 신라사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고대사학계 압도적 다수는 소위 말하는 부(部)체제설을 지지하는 증거로 본다. 부체제설이란 무엇인가?
신라, 고구려, 백제가 건국 이래 어느 시기까지는 왕권이 미약해서 중앙집권적인 편제를 하지 못하고, 왕조차 어느 특정한 지역 대표자에 지나지 않아, 자신의 직접적인 통치는 그 특정한 지역에 그치고, 기타 다른 지역은 유력한 지역 대표자가 있어, 각기 해당 지역에 대해 왕권의 제약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통치를 하는 지방분권 혹은 지방정권 연합적인 성격이었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런 해당 지역을 삼국 공히 部라고 하고 있어, 이들을 뭉뚱그려서, 이런 체제를 구축한 국가 초기 단계를 부체제라고 이름한다.
예서 관건 혹은 핵심은 중앙권력 편제와 지방행정 체계다. 부체제설에 의하면, 중앙권력 역시 王을 필두로 하는 각 部 대표자들이 '분점'하는 형태를 지닌다. 지방 역시 해당 지역 토호들이나, 중앙지역 각 부 대표자 중 어느 대표자 한 사람으로 통치가 귀결될 수밖에 없다.
<울진 봉평 신라비 하단>
이를 부체제설을 강화한 것이 1989년 발견된 저 냉수리비와 그 직전 발견된 524년 법흥왕시대 울진 봉평비였다. 보다시피 두 비에서는 신라 임금, 혹은 그에 버금하는 다음 권력자인 갈문왕도 자기 현재 거주지를 밝힌다. 부체제론자들은 이것이야말로 당시 미약한 신라왕권의 표징으로 본 것이다. 왕이 얼마나 형편없었으면, 자기 거주지를 밝히겠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개별 왕이 여러 문제로 권력이 미약했을 수는 있을지언정, 왕을 둘러싼 권력상징의 총합인 왕권(kingship)과는 엄격히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왕권이 작동하느냐 아니냐는 그 국가가 중앙의 지배력이 그 정점에 위치하는 왕을 중심으로 왕경과 지방에 일원적인 국가 지배질서가 관철되고 있었는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저 두 금석문에서 우리가 주시할 것은 첫째, 모든 관료는 중앙관료건 지방관료건 관위와 관직이 있다는 사실이며 둘째, 왕경은 물론이고 지방이 철저히 최하위가 村이라는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관위가 있었다 함은 그것을 규율하는 권력 혹은 실체가 있었다는 뜻이며, 모든 지방이 행정구역으로 편제되었다는 것도 그렇게 편제한 힘이 있었다는 명확한 증거다. 그 힘이 바로 왕권이다.
같은 관료임에도 누구는 갈문왕, 누구는 일간지, 누구는 거벌간지, 누구는 도사요, 누구는 촌주요 하는 관위와 관직을 누가 부여했겠는가? 말할 것도 없이 왕권이다. 전국을 村이라는 행정조직 그물망으로 엮은 주체는 누구인가? 말할 것도 없이 왕권이다. 부체제설은 이 평범한 사실을 망각하고 말았다.
요컨대 부체제설을 신봉하는 자들은 눈뜬 당달봉사들이다. 모든 사람한테 주거지를 밝힌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지를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게 무슨 뜻인가?
인구 센서스다.
호구제를 말한다.
호적을 말한다.
센서스, 호구, 호적 없이 저런 발상 나올 거 같은가? 국가를 통치하기 위해서는 첫째, 인구를 파악해야 하고 둘째, 양안을 해서 지도를 그려야 한다. 이것이 통치의 양대 기반이다.
첫 번째와 관련해 모든 등장인물마다 거주지를 밝힌다는 것은 인구를 지역별로 파악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고, 두 번째와 관련해 신라가 왕경만이 아니라 지방을 그물망으로 촘촘히 얽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지방 가장 아랫 단위에 村이 위치한다. 그래서 모든 촌마다 촌주가 있었던 것이다. 이들 촌이 군과 현을 형성하며, 그런 군현이 일정한 덩치를 이루어 州가 된다. 다만 저 시대에 군현과 주가 있었는지는 불확실한 점이 있거니와, 비록 그런 명칭이 없다 해도, 그에 대응하는 다른 상위 지방행정조직이 있었음은 불문해도 가지하다.
신라는 아무리 늦어도 지증왕시대에는 인구와 국토를 그물망처럼 후려쳤고, 그물망처럼 얽어놓아 빠져나갈 구멍이 없게 만들었다. 저리 하는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그래야만 지방이 통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행정이라는 이름으로 군대를 동원하고, 노동력을 징발하며, 세금을 거두기 때문이다.
부체제설은 어린아이 소꿉장난 같은 주장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부가 대표하는 행정조직이 어느 정도 자율성을 지니지 않았냐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여전히 부체제설은 여전히 효력이 있다고도 한다. 하지만 이 또한 망발이다.
저들이 말하는 자율성이란 인류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요즘도 장차관은 자기 비서 데리고 다닌다. 작금 미투운동의 희생타가 된 안희정도 대규모 자기 사단을 거느리고 충남도청으로 들어갔다. 나아가 다른 기초자치단체장들도 각기 그런 자율성이 있다. 이것이 부체제설의 근거 이유일 수는 없다. 하나마나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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