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헌(竇憲)은 字가 백도(伯度)이며 부풍(扶風) 평릉(平陵),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함양(咸陽) 사람이다. 두융(竇融)의 증손으로 후한시대에는 외척으로서 要職을 역임했다.
후한 建初 2年(77), 황제 장제(章帝)가 두헌의 누이동생을 황후로 세우자 외척으로서 동생인 두독(竇篤)과 더불어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런 사정을 사서에서는 “賞賜累積, 寵貴日盛, 自王․主及陰․馬諸家, 莫不畏憚”이라 적었다. 황제가 내린 상이 쌓이고 총애가 날로 깊어지니 왕 이후 권세가로 그를 두려워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영원(永元) 元年(89), 竇憲은 刺客을 보내 太后 총신인 유창(劉暢)을 살해하고는 그 죄를 채륜(蔡倫)에게 덮어 씌우려 하다가 나중에 일이 발간되어 宮廷에 감금됐다.
후한서 두융전(竇融傳)에 붙은 두헌 열전에 의하면, 유창(劉暢)은 제(齊) 상왕(殤王)의 아들로 도향후(都鄕侯)에 책봉됐다. 이런 유향이 장제(章帝) 유달(劉炟)이 崩하자, 이를 조문하러 수도 낙양에 왔다가 태후에게 부름을 받아 알현했다. 하지만 유향이 태후의 총애를 받으면 곤란하다고 생각한 두현이 자객을 보내 몰래 그를 죽이고는 채륜에게 죄를 덮어씌우려 했다는 것이다.
아무튼 이 사실이 발각됨으로써 위험에 처한 두헌은 匈奴 토벌로 속죄(贖罪)하겠다고 상주(上奏)했다. 마침 後漢에 귀순한 南匈奴가 북흉노를 정벌하겠다며 出兵을 요청하자 기용되어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서 집금오(執金吾)인 경병(耿秉)을 부관으로 삼아 기병 4천을 이끌고 남흉노南匈奴․오환烏桓․강호羌胡 병사 3만여 명과 함께 출병했다.
이 정벌에서 竇憲은 정예기병 1만여 명으로 北匈奴를 계락산(稽落山), 지금의 몽골공화국 액포근산(額布根山)에서 대파하고 선우(單于)를 도주케 했다. 이에 竇憲은 다시 북흉노 여러 部를 추격해 요새를 넘어 3천리를 진격해 연연산(燕然山), 즉, 지금의 몽골공화국 항애산(杭愛山)까지 추격해 그 땅에 戰勝을 기념하는 석비(石碑)를 세웠다. 이때 전승을 기념해 반고가 지은 글이 《문선(文選)》 권56에 ‘봉연연산명(封燕然山銘)’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됐다.
이 전공으로 竇憲은 대장군에 임명됐다. 2년 뒤인 永元 3년(91年)에 다시 정벌에 나서 출병하니 이때 匈奴 주력군을 분쇄하고 선우의 황태후를 포로로 삼았으며 선우인 창황(倉皇)을 도주케 했다.
이로써 조정에서 확고한 지위를 확보한 竇憲은 皇位 찬탈을 계획했다. 하지만 이를 감지한 和帝가 중상시(中常侍) 정중(鄭衆)과 더불어 竇憲을 殺害코자 했다. 이에 永元 4년(92), 和帝는 竇憲 일파를 체포하라고 명하고 대장군 인수(印綬)를 몰수하니 이에 따라 두헌은 관군후(冠軍侯)로 개봉(改封)됐지만, 이는 사실상 강등이었다. 그 뒤에 두헌은 핍박을 받아 결국 자살하고 만다.《漢書》를 편찬한 저 유명한 반고(班固)는 바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獄死)했다.
和帝는 竇憲을 제거하고자 정중이 대표하는 환관을 이용했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환관의 권력 증대를 부르게 되니, 이후 後漢 왕조는 결국 저 유명한 당고지금(黨錮之禁)을 부르는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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