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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아버지 박헌영 전집을 준비 중이던 20년 전의 원경 스님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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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 아들' 원경스님 입적(종합)
양정우 / 2021-12-06 18:41:16
조계종 최고 법계 대종사·원로회의 부의장 지내…2004년 '박헌영 전집' 발간

공산주의 운동가 ′박헌영 아들′ 원경스님 입적(종합)

(서울=연합뉴스) 양정우 기자 =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 박헌영(1900∼1956)의 아들인 원경스님이 6일 입적했다. 세수 81세, 법랍 62년.조계종에 따르면 원경스님은 이날 오전 10시께 자신이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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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때나마 조선공산당에 관심을 표명하며 나름대로 관련 기사를 열심히 쓰던 때가 있었으니, 사회부에서 문화부로 전근한 98년 이래 2000년대 초반까지였다.

당시 나는 문화재와 더불어 학술을 전담했으니, 이 과정에서 학술 담당기자들이 접촉하는 잡지 혹은 연구단체 중에 역사문화제연구소와 그 기관지 계간 역사비평이 있었으니, 나 역시 이를 무대로 삼아 이 단체와 그 연구자들이 정리하는 관련 자료를 착목한 것이다.

박헌영과 김단야(본명 김태연), 그리고 임원근의 이른바 조선공산당 트로이카가 이끈 조선공산당 초기 역사는 당시 구소련에서 쏟아져들어오기 시작한 코민테른 자료들이 주요한 분석대상이었으니, 역사비평을 주무대로 삼아 이 분야 연구를 하는 일군의 젊은(지금은 다 할배다) 연구자가 있었으니, 정년퇴직을 했는지 아니했는지 확실치 아니한 임경석 성균관대 교수도 개중 한 명이었다.

그를 처음 접할 때는 교수로 자리를 잡기 전이었으니, 이런 근현대사 강사들이 사랑방처럼 삼은 데가 현대건설 인근에 있던(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역사문제연구소였다.

2003년 7월 연합뉴스 인터뷰 당시 원경스님 


당시 잡지 발간 실무 총책은 김윤경(이름이 정확한가?) 선생이었으니, 마침 그가 나랑 같은 김천 출신인 데다, 당시에도 이미 원로로 통한 이이화 선생 역시 이 단체 주축 원로그룹이었으니, 이 양반도 본적은 김천이라 이런저런 인연이 사적으로도 많이 닿았다.

당시 임경석 선생이 새로운 소련 자료들을 바탕으로 조선공산당 트로이카를 조명하는 글을 갈겨 제끼던 때였으니, 그때가 아마 이 양반 연구인생 황금기가 아니었던가 하는데, 암튼 그의 그런 일련의 연구가 나한테는 꽤나 신선하게 보였고, 따라서 그에 바탕하는 기사를 나는 한창 신나서 쓰기도 했더랬다.

그 과정에서 자연 저 주인공 원경스님이라는 존재도 접하게 되었거니와, 그때만 해도 나는 박헌영 혈육이 남한 땅에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아무튼 그 무렵 저가 아버지 전집을 준비한다는 말을 아마도 임 선생을 통해 듣고는 그에도 한창 관심을 기울이며, 언론에서는 아마도 내가 처음이 아니었을까 하는데, 박헌영 전집이 다름 아닌 그의 아들 원경을 통해 발간된다는 소식을 타전하기도 했으며, 그렇게 해서 시작한 전집이 마침내 대단원을 고했다는 소식도 내가 정리해 쓰기도 했다.

확실치는 않지만, 아마도 역비 사무실에서 원경스님을 나는 만난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인연이 있었기에 아래와 같은 인터뷰가 성사되지 않았겠는가?

유의할 점은 아래 2003년 원경 스님 인터뷰는 내가 아닌 함보현 기자가 했다는 사실이다. 함 기자는 연합뉴스 기자로 발을 디딘 이래 내내 메가리 없이 기자생활을 회의하는 모습을 끊임없이 보이더니 결국은 나 기자 안할끼다 하고는 박차고 나아가 공부에 일로매진, 사법고시에 붙어 지금은 무슨 법률사무소를 차려 그 대표로 일한다는 소문까지 듣기는 했다.

2004년 박헌영 전집 발간 즈음한 스님과 박헌영 관련 자료들 


문화부에 배치된 함보현은 학술과 문화재 2진을 했으니, 간단히 말해 나랑 같이 같은 분야에서 일했거니와, 하긴 그러고 보니 나같은 지독한 일진 만나 기자생활에 대한 회의가 더 커지고 그것이 결국은 이 생활을 집어치는 과정을 가속화하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 본다.

하긴 그때만 해도 문화부는 언론사회에서는 지금도 그렇지만 더 촉망받는 부서와는 거리가 멀었고, 개중에서도 젊은 기자들한테 학술과 문화재는 거의 쥐약 수준으로 기피하는 분야였으니 말이다.
그렇게 실은 학술 문화재 기자생활을 했으니, 혹 그가 지금 이 글을 본다면 미안하다는 말을 뒤늦게 해 둔다.

암튼 이 역시 분명치는 않지만, 저때도 원경스님 인터뷰를 나는 2진이라는 이유로 함보현 기자한테 떠밀었던 것인데, 실은 이 인터뷰는 내가 아마도 임 선생 아니면 김윤경 선생을 통해 주선한 자리였으니, 그렇게 해서 성사된 인터뷰가 바로 첨부하는 다음 기사다.

그런 그가 입적했단다.

나무관세음보살.


2003.07.08 15:56:34
작성부서 문화부

<연합인터뷰> 박헌영 전집」준비한 원경스님

(서울=연합뉴스) 함보현 기자 =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만기사(萬奇寺) 주지 원경(圓鏡.62) 스님은 지난 10여년간의 자료수집.정리 작업을 거쳐 「박헌영 전집」(전9권)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서 대표적인 공산주의자로 꼽히는 박헌영(1900-56)은 바로 원경스님의 아버지.

공산주의자 박헌영은 1946년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창당하고 미 군정에 쫓겨 북한으로 도피, 내각부총리 겸 외무장관을 거쳐 1950년 조선노동당 부위원장이 됐으나 한국전쟁 직후인 1953년 '미국의 스파이', '반당 종파분자' 등의 죄목으로 체포돼 1956년 처형당했다.

유족으로는 여성 혁명가 주세죽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박비비안나(75.러시아 무용가), 둘째부인 정순년 사이에서 난 원경 스님, 김일성의 소개로 결혼한 윤례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1남 1녀(북한 거주)가 있다.

전집 작업에 대해 원경 스님은 파란만장했던 아버지 박헌영의 기억을 되살리는 한편 "북에서는 종파분자로 숙청당하고 남에선 공산주의자로 외면당했던 아버지 박헌영의 삶을 재조명하자는 뜻에서 시작하게 됐다"고 밝혔다.

박헌영 두번째 부인으로 원경스님 생모인 정순년&nbsp;


원경 스님은 10년이란 오랜 세월이 걸린 이유에 대해 "국내외에 산재해 있는 자료를 찾고 정리하는 작업이 가장 힘들었다"고 말했다.

"가장 중요시했던 것이 1차 자료의 확인과 확보였기 때문에 1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습니다. 평소 관심을 갖고 있던 전국의 학자들과 유학생 등 120여명이 분야별로 공동 집필을 했고 60여명이 편집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자료 수집에는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것에서부터 정부 보관문서까지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셨지요"

원경 스님은 가장 힘들었던 부분으로 경제적인 문제를 들었다.

"많은 분들이 동참한 일에 당연히 경제적인 뒷받침이 필요하지요. 사실 불제자인 제가 자금을 넉넉히 마련할 능력은 없었어요. 연구하시는 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겁니다."

스님은 박헌영 선생에 대한 기억이 그리 많지 않다고 전했다.

"내가 아주 어릴 때 그 분이 북으로 가셨을 뿐 아니라 집에서도 한 번도 같이 잠을 잔 적이 없을 정도로 바쁘게 지내셨기 때문에 기억이 선명하진 않습니다. 문산(文山) 김삼룡(金三龍) 선생 같은 친구분들이 집에 오시곤 한 것은 기억에 남습니다"

박헌영 선생이 월북한 이후로 원경 스님은 험난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고아나 다름없던 나를 아버지 친구분들이 보살펴 주시곤 했습니다. 10살 되던 해인 1950년에 아버지 측근이셨던 한산(寒山) 스님이 날 데리고 다니면서부터 불가에 입문하게 되었지요. 한 곳에 서너달 이상은 머무르지 않았어요."

원경 스님은 1972년에 군인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기도 했고 1980년에는 안기부에 불려가 심문을 받기도 했다.

"'아버지가 누구냐'고 묻길래 '나는 고아니 아무 것도 모른다'고 대답했습니다. 출가한 제게 박헌영 선생은 나를 낳아준 아버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 분에 대한 평가는 다른 분들이 할 수 있겠지요. 다만 객관적인 자료가 있다면 평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집의 취지도 거기에 있지요."

그러면서 원경 스님은 "전집은 오는 추석 이후에나 출간될 것 같다"면서 "박헌영 선생과 그 주변 인물들이 이 세상에서 보여준 행적과 그 의미를 밝혀내는 데 도움이 될 자료가 될 수 있다면 만족한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마무리 교정에 들어간 전집 출간에 앞서 작업에 공동 참여한 성균관대 임경석 교수(45)가 연보(年譜)만을 묶어 「박헌영의 생애-박헌영 연보 1900~1956」(여강출판사 刊)을 펴냈다. 박헌영 전집 9권 가운데 한 권.

이 책은 박헌영과 관련한 시기별 사건과 코민테른 자료를 통해 해방 직후 박헌영이 조선 공산당 대표자격으로 미군정 사령관인 하지 중장과 여러 차례 만나 시국을 논의한 사실 등 매 시기 행적에 대한 방대한 근거자료를 제시하고 있다. <사진 있음>

hanarmdri@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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