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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문화재를 맡아주었으면 싶다"는 문화부장의 연락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10.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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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안하지만 태식 씨가 문광부까지 맡아줘야겠어."

딱 2년에 걸친 사회부를 마치고 문화부에 배당된지 석달쯤 지난 1999년 2월, 당시 박찬교 문화부장이 나를 불러서는 이리 말하는 게 아닌가? 당시 나는 기자생활 7년차라, 이미 신참을 벗어난 시점이었으니, 이런 요청이 곤혹스럽기만 했다.

당시 문화부는 언론계에서는 이른바 간지부라 해서 체육부와 더불어 이른바 곁다리로 취급받던 시절이라, 간지부란 당시 신문발행을 기준으로 체육문화면이 신문 본판에는 들어가지 못하고 별지로 제작되던 시절이라 해서 그리 일컬었으니, 뭐 무시경멸이 들어있었다.

그에 견주어 이른바 정경사라 해서 정치 경제 사회부가 언론계 주축으로 취급받았으니, 이런 사정이 지금이라 해서 근간에서 달라진 건 없다고 나는 본다. 문화의 시대는 허울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사정은 인력배치에도 그대로 드러나 당시 문화부에는 기자라 해 봐야 10명이 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이 적은 기자가 문화부 전 영역을 커버했으니, 뭐 제대로 될 리 만무하지 않은가?

1999. 2. 19 한자병용을 내세운 문광부를 반대하는 한글전용주의자들의 반대 집회. 이 사건이 내가 문광부도 뛰어들게 되는 계기가 된다.  


1998년 12월 1일자인가로 문화부로 나는 전근했으니, 나로서는 언젠간 문화부는 가고 싶었지만, 준비된 시점은 아니었다.

사회부에서야 내가 사라져줬으면 하고 바랐을 테고, 문화부에서는 와 줬으면 했는데, 그것이 맞아떨어졌으리라 나는 본다.

당시 문화부 근무는 내가 자원한 것은 아니었다. 박찬교 부장 요청에서 비롯된 것인데, 인사 전에 박 부장이 아마 휴대폰으로 연락을 주었다고 기억하는데 골자를 추리면 이랬다.

"태식씨가 문화부로 와서 꼭 문화재를 맡아줬으면 싶다. 우리가 지금 문화재 물을 너무 많이 먹는다."

왜 하필 그 시점에 문화재 담당 기자로 나를 찍었는지 내가 알 수는 없다. 다만 내 추측으로 내가 역사 쪽에 관심이 좀 있고, 실제로 그 전 부산지사나 사회부 시절에 관련 기사를 더러 썼다는 소문이 난 데다, 당시에는 문화재 분야가 이른바 아사비판이라, 특종과 낙종이 오가던 험악한 시절이었으니, 그런 데서 자꾸만 연합이 물을 먹으니 혹 내가 이쪽 분야를 담당해주면 그런 일이 상대로 적어지지 않을까 해서지 않았을까 라고 짐작해 볼 뿐이다.

내 그릇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런 제안에 내가 그리 크게 고민하지는 않았다고 기억한다. 언젠간 가서 해 보고 싶은 분야라 막연히 생각하던 그쪽 일을 좀 앞당기면 될 뿐이다.

무엇보다 그런 자리에 내가 필요하다 해서 먼저 연락을 줬으니, 나로서는 그런 제안이 고맙기 짝이 없었다.

내가 합류할 즈음 문화재 분야에서는 기라성을 방불하는 민완기자들이 득시글할 때였으니, 조선일보 신형준, 한국일보 서사봉, 경향신문 최정훈, 동아일보 이광표, 문화일보 최영창이 시장을 선점하고 있었다고 기억한다.

기자 경력으로 보면 나이는 나보다 많은 이광표가 나보다 1년인가 후배이고, 나머지는 조금 선배였으니, 실은 같은 세대를 호흡하는 동시대 기자들이었다.

인사방이 붙어 문화부 기자로 발령나고 문화재와 학술 분야를 할당받은 나는 마침내 저 시장에 뛰어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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