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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2005 식목일 낙산사 산불(1) "낙산사 덮치는 거 아냐?"

by taeshik.kim 2022. 3.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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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국경일을 비롯한 공휴일이 너무 많다는 경제계 오랜 공습에 2006년 식목일이 기어이 희생되었다. 2006년 공휴일이 폐지되고 말았으니, 2005년 4월 5일이 나로서는 마지막 공휴 식목일이었다. 당시 달력을 보니 아래와 같이 화요일이다.


요즘이야 주 52시간을 넘길 수 없다 해서 기자사회 역시 엄청나게 변화했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솔까 주말이건 공휴일이건 의미가 없었으니, 내가 확실히 기억하는 한 가지는 그날 나는 수송동 공장 4층 편집국으로 출근해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요샌 이런 풍경이 거의 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보통 언론사 편집국은 상시로 TV 채널을 이곳저곳에 것도 졸라 큰 볼륨으로 틀어놓던 시절이라, 요새 같으면 소음 공해로 질식사하고 말 일이지만 그때는 그것이 상사常事였고, 왠지 모르게 언론 티가 나는 일처럼 간주되곤 했다. TV가 한두 대인가? 것도 이 채널 저 채널 꽝꽝 틀어놓으니 정신이 사납기 짝이 없었다.

그날 주축 뉴스는 동해안 산불이었다. 전날밤 11시53분 무렵 강원 양양군 화일리 고속도로변 한 야산에서 시작되었다는 산불은 초속 20미터 강풍을 타고는 삽시간에 주변으로 번져 이후 장장 서른두시간 동안이나 결국 973㏊라는 막대한 면적을 잿더미로 만들고는 6일 오전 8시쯤 죽은 것으로 선언됐으니 말이다.

불덩이로 순식간에 변한 낙산사. 연합DB


이때 화재가 요상했던 점 중 하나가 불길이 죽었다가 예수님처럼 오똑하니 나 여기 있다 하고 살아났다는 사실이다. 이 의아한 순간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당시 언론보도를 종합해 보니 이 산불은 식목일 당일 아침 7시 무렵에는 바람을 타고 낙산해수욕장까지 번졌지만 오전 11시 20분 무렵에는 큰 불이 거의 잡혔다는 판단 아래 대피한 주민들이 속속 집으로 복귀했다. 진화에 동원된 헬기들도 마침 고성에 발생한 산불 현장으로 급파되었다.

하지만 거의 다 잡았다는 불길이 오후 1시 무렵이 되자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났다. 강풍을 타고 불길이 되살아났다는 소식에 고성으로 가던 헬기들이 도로 방향을 돌리지만 이미 늦었다. 쉬었다 살아난 불길은 더욱 맹렬했고 오후 3시30분 낙산사로 번져 불과 1시간 만에 낙산사 전각 대부분을 태우고는 홀연히 다른 곳으로 옮겨붙었다.

편집국에서 생방송을 통해 이런 전개를 지켜보던 나는 특히 되살아난 불길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저러다 낙산사가 다 타겠다."

활활 타는 보타락. 연합DB


나 같은 문화부 기자, 특히 문화재가 담당인 기자는 보통 이런 사건사고랑 직접 관계는 없다. 해당 현장에 문화재가 있으면야 모를까 말이다. 하지만 그 현장이 낙산사라면 달랐다.

낙산사 그 자체는 개창주 의상 스님으로 거슬러올라가는 그 장구한 역사와는 달리 실상 문화재 관점에서는 그다지 중요성이 크지는 않다.

보통 역사성은 해당 사찰 그 자체 역사보다는 그 사찰이 보유하는 문화재, 특히 개중에서도 대웅전을 비롯한 건축물이 중심이기 마련이라, 그런 점에서 당시 낙산사를 구성하는 모든 건축물은 한국전쟁에 전소되고 그 이후에 다 새로 지은 것들이었다. 문화재 관점으로 보면 그들 어떤 건축물도 문화재가 아니었다.

다만, 그런 중건 새삐 사찰이라 해도 첫째 그 역사성과 그에서 비롯하는 상징을 무시할 수는 없고, 둘째 건축물 같은 부동산이야 그렇다손 쳐도 그에서 소장하는 성보聖寶 중에서는 분명 문화재로 지정되거나 그런 가치를 충분히 지닌 것들이 적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낙산사는 후자였다. 특히 동종이 문제였다.

활활 타는 범종각과 그 범종. 우리 공장 유형재 기자가 포착한 장면이다. 연합DB. 이 범종이 문제의 보물 범종은 아니었다. 이건 살아남았다.


한데 TV 화면으로 믿기지 않는 광경이 펼쳐지는 게 아닌가? 보물로 지정됐다는 그 거대한 동종을 안치한 종각이 활탈 불타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걸 보고서는 이렇게 탄식했다.

"다 녹았다.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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