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문광부, 한자병용이 씌운 덤터기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10. 13.
반응형

문화부로 전근하고 3개월 남짓 지난 1999년 2월 9일, 당시로는 아마 약칭으로 문광부라 했을 문화관광부가 어문정책 불을 싸지른 발표를 들고 나왔으니 이른바 한자병용이라

이 문제가 워낙 폭발성 있는 까닭에 최현배 세례를 듬뿍 받은 연세대 국어학 계열 한글순수운동주의자들과 서울대와 이희승에 뿌리를 두는 혼용 계열이 박터지게 싸웠으니 지금은 국립국어원이라 일컫는 국립국어연구원이 그 진원지였고 그 수장은 서울대 교수 심재기였다.

지금 보면 아무렇지 않게 보일 수도 있지만, 물론 한글단체들은 반발한다, 이 사안이 기름을 부었으니 언론사도 갈려서 조선 동아가 당연 찬성 쪽이었고 한겨레야 노동신문과 마찬가지로 한글전용론이었으니 이 사태는 날이 가면서 계속 불이 붙었다.


1999년 당시 문광부 광화문 청사. 지금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다.



당시 문화부 인력현황은 앞서 말한대로 처참한 지경이라 누군가는 이 사안을 전담해야 했으니 결국 내가 징발되었다.

열라 썼다. 그야말로 물 만난 고기마냥 졸라 썼다. 나 아니면 쓸 수 없는 기사들을 썼다.

이것이 화근이었다. 이 사태가 발발한지 이틀째인가 박찬교 부장이 부르더니 왈..

태식씨, 미안하지만 문광부까지 맡아줘야겠어.

문화재 학술 전담이라 기관만 해도 한꾸러미라 문화재청 박물관 말고도 교육부 산하 기관 중 학술성 짙은 기관, 예컨대 국사편찬위원회며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대한민국학술원, 당시는 문광부 산하였다가 지금은 국가보훈처로 넘어간 독립기념관 등등 오만잡탕이 내 담당이고 출판도 학술은 내 담당이었으니 가랭이 찢어지는 형편이라

그 형편에 문광부까지 떠넘기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이미 편집국장한테도 보고한 사안이라며 거부할 수도 없었으니 돌이켜 보면 내 인생 가장 바쁜 시대가 서서히 팡파르를 울리기 시작했다.

그 진원지는 서울 풍납토성이었다.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