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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山雜談

안중근은 神이 아닙니다

by Jeronimo 2023.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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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응칠역사」에서 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를 받는 대목이다. 본인은 음력 1월 3일로 적었지만 실제 선고일은 음력 1월 5일, 양력 2월 14일이었다.

 
此日、到于法院、則眞鍋裁判官宣告曰、安重根處於死刑、禹德淳三年懲役、遭道先柳東夏各一年半處役云云、而與檢察官如出一口。而控訴日字、限五日內、更定云後、不更不打話、紛紛終判以散。時一千九百十年、庚戌正月、初三日也。「安應七歷史」
 
안중근 의사 자서전 「안응칠역사」에 나오는 사형선고를 받는 대목이다.

흔히 안중근의 진면목은 이토를 쏘고 난 이후 감옥과 법정에서 벌였던 일본과의 논리투쟁 과정에서 드러난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은 일제가 남긴 방대한 신문기록과 재판기록, 외무성과 통감부 보고자료, 그리고 언론에 보도된 기사로 남아 있다.

거기에 더해 안중근 본인이 남긴 자료도 적지 않은데, 의거 과정은 소략하지만 성장과정이나 항일투쟁에 뛰어들기 이전 '인간 안중근'을 알 수 있는 기본 자료가 바로 자서전 「안응칠역사」다.

이는 이미 안중근이 뤼순 감옥 수감 당시 일본어 신문인 『만주일일신문』 에 '안중근이 옥중에서 자서전을 쓰고 있다'라는 내용이 보도된 적이 있었지만 순국 이후 그 실체는 물론 내용에 대해서도 일체 공개되거나 보도된 적이 없다.

해방 이후 1960년대 말에 동경에 있던 최서면 선생이 간다의 고서점에서 그 일부를 입수하게 되어 그 존재가 최초로 드러났고 이어 나가사키에서 한문본이 출현하였으며, 1979년에야 일본 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시치조七條문고에서 그 유명한 「동양평화론」과 합철된 완전한 형태의 「안응칠역사」가 김정명市川正明 선생에 의해 발견돼 전모를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발견된 「안응칠역사」는 모두 안중근의 육필 원고가 아니다. 가장 완전한 형태의 「안응칠역사」(일본 국회도서관 시치조본)조차 맨 뒤에 뤼순 감옥 전옥典獄 구리하라栗原가 필사했다는 내용이 첨부된 것이다.

그렇기에 「안응칠역사」를 두고 그 평가가 엇갈리는 것이 현실이다. 한쪽에서는 일본의 기록을 믿을 수 없으니 「안응칠역사」 기록을 맹신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필사본인 「안응칠역사」조차 일본의 조작이 들어갔을 테니 진정한 육필 원고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이조차 믿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한다.

일본 본토도 아닌 역외 영토 도독부 감옥서의 관리가 수감자의 어린 시절까지 날조해 창작했다면 정말 대단한 능력이고(「안응칠역사」는 당시 비신자였던 일본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가톨릭 교리에 관한 내용이 상당 부분을 차지한다.) 반대로 그들 자신의 기록을 조작했다면 관동도독부-외무성/한국통감부-외무성으로 이어지는 이중 보고 체계에서 서로 모순이 생겼을 것이다.

아무튼, 이런 상황은 후대인들인 우리가 고민하는 것이고 안중근 본인은 감옥에서 담담히 본인의 자서전을 집필한다. 모든 것은 기억에 의존한 것이므로 '자서전'이되 모든 내용이 사실과 부합하지는 않는다. 

위 사진은 안중근이 사형 선고를 받는 대목인데, 본인은 그 날짜를 "경술 정월 초삼일"이라고 적고 있다. 안중근은 「안응칠역사」에 등장하는 모든 날짜를 음력으로 썼다. 그렇다면 경술년(1910) 정월의 양력은 어떻게 될까.

 

경술년(1910) 정월이 포함된 양력 달력이다. 이해 (양)8월 망국해 "경술국치"라 부른다.

 
안중근이 사형 선고를 받은 1910년 경술년 정월은 2월 10일 시작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게 (연호는 썼을지언정) 음력은 의미가 없었고, 대한제국 정부도 1895년부터 양력을 쓰기로 해 음력 11월 17일이 양력 1896년 1월 1일로 강제 전환(?)되었다.

1895년 12월 사료가 부족한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1896년 1, 2월 사료는 날짜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 이를 맞아 고종이 세운 연호가 바로 "건양建陽"이다.

다시 달력을 보면 안중근이 말한 정월 초삼일은 양력 2월 12일로 토요일이었다. 당시 일본 법원은 일요일에 휴정을 했고 월요일에 선고 공판을 개시해 실제 선고는 2월 14일, 음력 1월 5일에 이루어진다.

최근 밸런타인데이에 안중근을 기억하자는 움직임이 있는 것이 바로 2월 14일이 사형선고일이라서다.

정월 초삼일(2월 12일)은 선고일이 아니라 5회 공판일이었다. 이미 검사의 구형은 4회 공판일인 2월 10일, 즉 정월 초하루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구형대로 선고가 이루어졌다. 그래서 「안응칠역사」의 다음 구절이 "而與檢察官如出一口。"인 것이다.(아무도 이를 지적한 사람이 없다.)

안중근은 「안응칠역사」를 1909년 12월 13일에 집필을 시작해 1910년 3월 15일에 탈고하였다. 사형 선고를 받는 부분은 거의 마지막 부분에 해당하는데 탈고일 기준으로 약 한 달 전 상황을 날짜를 혼동한 것이다.

그렇다면 「안응칠역사」는 신뢰할 수 없는 자료인가.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기에 이제부터 조금씩 살펴보는 기회를 갖고자 한다. 영웅이로되 신은 아닌, 인간 안중근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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