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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암울했던 기억 속의 <종로서적>과 <교보문고>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9.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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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일





1978년 2월 중순, 드디어 제대를 했다. 군 생활 중에 일어났던 일들이 활동사진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1975년 5월 6일 전주 35사단에 입대를 했고, 강원도 철원에 자대배치된 1975년 10월쯤이던가, 행정병이 휴가 갔다 돌아오면서 사가지고 온 레코드판이 송창식의 음반이었다.

<날이 갈수록>< 고래 사냥>이 들어 있던 그 음반을 들으며 ‘가을이 가네, 청춘도 가네.’라는 노래를 들으며 이러다가 꽃 피우지 못한 청춘이 다 지나갈듯 싶어서 애달파했던 추억, 1976년 8.18 도끼 만행 사건 때에는 전쟁이 나도 좋겠다는 허황 된 생각을 했던 일, 겨울에 큰 눈이 내리면, 그 시간이 새벽이라도 일어나서 부대 앞 철원의 44번 국도의 눈을 치우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종로서적



그렇게 먼 곳에 있을 것 같았던 제대가 눈앞에 닥친 것이다. 다른 동기들은 제대 일 년을 남겨두고부터 달력에다 표시를 해가며 제대 날짜를 기다렸지만, 나는 딱히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고, 걱정만 앞섰다.

집안사정은 내가 입대할 때보다 더 어려운 편이었고, 어디건 탈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예정된 날은 다가오고, 예비군복을 받고나서야 ‘내가 제대를 하게 되었구나.’하고, 실감을 했다.



교보문고



여러 가지 절차를 마치고 군 생활 중에 받은 마지막 병장 월급 2,400원과 3년에 가까운 동안 부은 적금을 탔다. 맨 처음이자 마지막 적금이었다. 33개월 15일 동안 부은 적금이 2만원, 무엇을 할 것인가? 다른 여지가 없다. 서울에 가서 책을 사자,

포대장에게 전역신고를 하고, 철원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마장동 가는 버스를 탔다. 삼 년 동안 휴가를 오갈 때마다 다녔던 낯익은 44번 국도를 타고 관인을 지나고 포천을 지나 의정부 터미널에서 버스가 떠날 무렵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신정일의 서가



“야 신정일”

자대 배치 되었을 때 처음 만났던 인사계였다. 새로 생긴 부대로 옮겨갔던 인사계, 사람이 좋아, 고기가 나오면 자기 돈으로 짜장재료를 사다가 짜장밥을 만들어서 군부대원들이 먹는 것을 웃음 지으며 바라보던 인사계를 여기서 보다니,

“너 제대하는구나.”

“예”

뭐라고 말할 사이도 없이 버스는 떠났고, 그렇게 한 시절의 인연과 작별을 고하였다.

마장동에서 내리자마자, 서울 종로서적으로 갔다. 여러 층으로 되어 있던 종로서적에서 집으로 돌아갈 차비만 남기고 내가 보고 싶던 몇 권의 책을 사 가지고 나오는데, 그때 슬픔처럼 한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오로지 작가만을 꿈꾸며 살았는데, 이렇게 많이 꽂혀진 책들 중에 내가 쓴 책이 이 서점에 꽂힐 날이 과연 있을 것인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서점을 둘러보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제대를 해서 서울에 왔는데, 서울에서 누구 한 사람 만날 사람이 없었다. 고속버스를 타고 내려오는데, 기쁨은커녕 오히려 집 채 만한 걱정만 앞세우고 돌아오는 길, 막막하기만 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지? 다른 사람들처럼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나온 것도 아니고, 기술 하나 배운 것도 없고, 그렇다고 작가를 하겠다는 생각만 했지, 제대로 글 한 편을 써 둔 것도 없었다.

내 생각은 아랑곳 없이 버스는 천안을 지나고 대전을 지나 전주를 향해 달리고, 드디어 도착한 전주, 전주의 날씨는 춥기만 했다. 추워도 철원만 하겠느냐는 생각에 버스를 타고 임실역을 거쳐 도착한 집, 아버님은 내 예상을 뒤엎지 않고 기침소리로 당신의 실재를 전했고, 방문을 열자, 아랫목에 병색이 완연한 모습으로 누워 계셨다.




그날 오랜만에 다시 여섯 식구들이 모였다. 삼 년의 세월이 지났는데도 한 치도 더 커지지 않고 오히려 오므라든 것 같은 그 작은 방에 모여서 그냥 지난 세월만 이야기했을 뿐이다.

어떻게 해야 좋을까? 예전처럼 살다가는 다 굶어 죽을 수밖에 없고, 나가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에게 옷이라도 사 입고 나갈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세끼 밥도 힘들 형편이라고 했다.

임실역에서 일을 할 수 있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갔더니, 침목(기찻 레일 받침목)을 고르는 일이 있었다. 하루 5천 원의 일당을 받고 엿새를 해서 번 돈으로 사제 옷 한 벌을 사 입고, 예비군복을 챙겨서 서울로 올라간 것은 1978년 2월말이었다.  

그 뒤 수많은 슬프고 아름다웠던 이야기가 내 육신을 스치고 지나간 뒤, <다시 쓰는 택리지>가 2006년 휴머니스트에서 다섯 권으로 마무리된 뒤 KBS < TV 책을 말하다>에 방영되고서 <교보문고>에서 작가와의 대화에 선정되었다.




청량리역에서 200여 명의 독자와 정선 기행을 진행하면서 그 당시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강연을 했다.

그때 제대하고서 책을 샀던 <종로서적>이 아닌 <교보문고>에서 주최한 작가와의 대화, 나는 그 강연을 하는 동안 얼마나 많은 추억들이 스치고 지나갔는지,
‘꿈을 꾸고 사느냐,’ ‘꿈을 포기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던 기억이었다.

그리고 2024년 현재 <신정일의 신 택리지>가 10권으로 개정되면서 완간되었고, 평생동안 모은 책들을 <신정일의 서가>라는 이름으로 조촐하게나마 열게 된 것은 내가 돈키호테처럼 살았지만 그래도 헛살지 않았다는 방증이 아니겠는가?

이 서가에 글씨를 써준 송하진 전 지사님, 여태명 아우, 그리고 현판을 써서 만들어 준 우리 땅 걷기 전성수 형에게 심심한 감사의 말을 전한다.

산천을 답사하는 것은 좋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 맞는 말이다. 그런 결과 오늘이 있지 않은가?

2024년 9월 19일


*** editor's note ***


연전에 서울역사박물관 공평동유적전시관서 종로서젹 특별전을 개최한 적 있다.

황해진과 류위남이 조사하고 꾸미느라 고생한 전시다.

그 후속담의 하나로 전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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