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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통감> 권13, 고려 태조 25년의 史贊.
忠宣王이 일찍이 臣 이제현에게 묻기를, ‘우리 태조 때에 거란이 보내온 낙타를 다리 아래에 매어 놓고 꼴이나 콩을 주지 않아 굶어 죽게 하였기 때문에 그 다리 이름을 '낙타다리'라 하였다. 낙타가 비록 中國에서 생산되지 않지만 중국에서도 일찍이 낙타를 기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나라의 임금으로서 수 십 마리의 낙타를 가지고 있더라도 그 피해가 백성을 해치는 데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며, 또 이를 물리치면 그만이지 어찌하여 굶겨서 죽이기까지 하였을까?’ 하므로, 대답하기를, ‘創業하여 왕통을 전하여 주는 임금은 그 보는 것이 멀고 생각하는 것이 깊어서, 후세 사람으로는 따를 수가 없습니다. ... 우리 태조께서 이렇게 한 까닭은 장차 오랑캐의 간사한 계책을 꺾으려 함이었는지, 아니면 또 후세의 사치스런 마음을 막으려는 것이었는지 모르지만, 대개 隱微한 뜻이 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는 전하께서 공손히 마음속으로 생각하여 힘써 실천해 체득하는 가운데에 있을 뿐이며, 어리석은 신하로서 감히 경솔하게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 台植補 ***
이를 태식이 갈파하기를 낙타한테 줄 꼴이 없어서여서 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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