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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언어 천재 김수경이 남기고 간 모리스 쿠랑 번역서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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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경金壽卿(1918-2000)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경성제대와 동경제대에서 언어학을 전공했는데 지도교수가 무슨 이런 천재가 다 있나 혀를 내둘렀다는 이,

무려 14개 언어를 할 줄 알았고 그 중 7개는 '직독직해직강'이 가능했다는 이,




해방 후에는 경성대학, 경성상업학교 교수를 역임하고 진단학회 재건에 참여했으며, 월북 후에는 김일성대학 강좌장과 교수, 초대 도서관장을 맡고 북한의 언어정책에 큰 영향을 끼쳤던 이...

그런 그가 북으로 가기 직전, 책 한 권을 남에 남겨놓고 갔다.

프랑스 서지학자 모리스 쿠랑(1865-1935)이 지은 <한국서지>의 첫머리 부분을 따로 떼어 번역한 <조선문화사서설>(1946년 범장각 발행)이다.




해금 이후 범우사 문고본으로 나와 지금까지도 읽히는 책인데, 운 좋게 초간본을 만나 구하게 되었다(그리 비싸진 않았다는 점을 밝힌다).

김수경은 임화(1908-1953)와 신구현 두 사람의 권유로 이 책을 번역해 펴냈다고 발문에서 밝히고 있다.

둘 다 월북한 이들인데, 임화는 한국 근대 문학사에서 빠질 수 없는 카프KAPF의 그 임화이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을 했던 그가, 외국인이 한국 전통문화를 논한 저술의 번역을 권했다는 게 흥미롭다.

하기야 임화는 평소에 두보 시집을 끼고 다니며 영감을 얻곤 했다는 일화가 있으니 어쩌면 그 시절다운 모습이라고 할까.

해방 전후에 나온 책치고 종이가 멀쩡한 것이 드문데, 이 책은 종이가 살짝 바래고 표제글자가 번진 것 말고는 파손된 부분이 거의 없어 지금도 독서가 가능할 정도다.

갖고 있던 분이 퍽 아껴 읽었던 모양인데, 그 분이 누구신지는 장서인이 알려주고 있다.

책이 5월 20일 발행되는데 장서인은 7월 26일 찍었으니, 서점에 나오자마자 사서 읽으셨던가 보다.





그런데 그 주인공은 뜻밖에 신부님이었다.

Leo가 세례명인 박씨 신부님인데, 박신부라고 하니까 <퇴마록>의 박신부님이 젊은 시절 보았던 책인가 하는 헛생각을 살짝 하게 된다.

이때 박신부님이 20대였다고 해도 지금은 100세 가량이니 아마 돌아가셨을테고...

어느 성당 사제관에 있었을 책이 주인의 손을 떠나서 돌고 돌아 여기까지 왔다.

누군가의 말처럼 "사람은 가고 책만 남았다."

김수경 평전이 최근 일본에서 나왔고,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출간을 준비 중이라고 한다. (2022. 1. 29)

***

<우연인지 필연인지>

오늘인가 내일인가 김수경 평전 한국어판 출판기념회가 있다고 들었다. 가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본다.

모더니스트 시인으로 이름높고 영화배우를 했을만치 세련미 가득했던 임화이지만, 그 문장력의 저변에는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있었음을 엿본다.

관심과 호기심과 흥미가 없으면 이런 책을 알지도 못할 터,

하물며 친구에게 이거 꼭 우리말로 번역해야 한다고 매달렸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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