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探古의 일필휘지

엄비 칠궁 현판을 쓴 이완용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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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독립문 한글 한자 편액을 누가 썼는지에 관해 시끌시끌했던 적이 있다.

천하의 매국노 일당 이완용(1858~1926)이 다른 문도 아니고 '독립문'의 편액을 썼다니 라며 놀라고 또 부정하며 화내는 분이 많았다고 기억한다.

하지만 독립문을 세우던 1890년대 당시(그로부터 십여 년 뒤가 아니라) 그의 정체를 생각하면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조선은 미국같이 되기를 바라오"라고 연설했던 독립협회 창립발기인, 이완용 말이다.

어쨌거나, 이완용은 편액서, 곧 현판글씨에도 제법 능했던 건 맞는 것 같다.

높이 거는 현판의 특성상, 작은 글자를 확대해서 새겼다간 획이 지나치게 가늘고 힘없어 보인다.

그래서 현판에 새길 글씨는 다른 붓글씨보다 굵고 강하게 써야 한다.

이완용이 덕수궁 숙목문肅穆門, 김천 직지사 대웅전과 천왕문 편액 등을 썼다는 건 기왕에 알려져있다.

그런데 이완용의 전기 <일당기사一堂紀事>를 보면 더 많은 편액서를 쓴 흔적이 보인다.

예컨대 1911년 7월 29일, 이완용은 귀비 엄씨(1854~1911)의 장례에 참석해 엄귀비의 시호, 궁호宮號(사당 이름), 원호園號(무덤 이름)를 의정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고종이 이완용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덕안궁德安宮이란 세 글자 편액을 써서 들이라."

이완용은 그 명을 받들었다.

덕안궁은 그날 정한 엄귀비의 궁호다.

덕안궁은 한동안 지금의 서울시의회 자리에 있었는데, 1929년 도시계획으로 경복궁 뒤 육상궁毓祥宮(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 사당) 옆에 이전된다.

그로서 이른바 '칠궁'이 완성된다.

지금도 거기엔 덕안궁 건물과 편액이 남아있는데, 그 편액을 보면 해서楷書라 개성이 잘 드러나지 않긴 해도 두인변의 둘째 획이 길게 뻗는 등 이완용 글씨의 특징이 언뜻 엿보인다.

과연?



일당기사; 이완용 연보의 해당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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