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사 경내 불교중앙박물관이 최근 특별전을 개막했으니, '불심의 향연'과 '나들이 나온 나한'이 그것이라. 지난 3일 나란히 개막한 이 두 특별전은 부처님오신날이 낀 기간을 포함해 오는 7월말까지 같은 자리에서 계속된다. 이중에서 오늘은 후자를 소개하되, 이번에는 주최측 의도를 존중해, 현장 안내판 설명문을 통해 정리하고자 한다.
전시실 외곽 입구
나한 전시는 여수 흥국사라는 특정 사찰을 중심으로 나한신앙을 소개 정리하려 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이 여수 흥국사는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직 현장을 밟은 적이 없다.
특정한 사찰 나한상이므로, 우선 특별전은 이 흥국사가 어떤 사찰인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안내 문구는 내가 군데군데 손질했음을 미리 밝힌다. 다만, 내용에는 단 한 군데도 손대지 않았다.
나라가 흥하면 절이 흥하고, 절이 흥하면 나라도 흥한다
영취산靈鷲山 흥국사興國寺
흥국사는 고려 1196년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1158~1210)이 창건했다. 사적기寺蹟記에 ‘나라의 이익과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참선 수행과 심신 인마 心身鍊磨에 환경이 좋은 곳을 택하여 가람을 창설했다.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하고 나라가 흥하면 절도 흥할 것이다‘라고 쓰여 있다.
이후 쇠락한 사찰을 조선 1560년경 법수대사法修大師가 중창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흥국사에서는 기암대사奇巖大師가 스님 300여 명을 이끌고 충무공 이순신을 도와 수군으로 크게 활약했다. 사중寺中에 전하는 다양한 유물과 문헌을 통해 당시 흥국사 스님들의 활약상을 확인할 수 있다. 전쟁 후에도 흥국사 스님들은 나라를 지키는 일을 계속하였다. 17~18세기 흥국사에는 많을 때는 700여 명에 이르는 승군이 머물렀다고 한다. 이렇듯 흥국사는 최고의 승군 주둔지로 위상이 높았다.
요새야 도심 사찰 등장으로 사정이 달라지긴 했지만, 거의 모든 사찰은 그 레이아웃에 일정한 패턴이 있어, 우락부락 금강역사라든가 더 우락부락 네 형제 사천왕이 지키는 문을 통해 불국토로 들어선다. 그런 건축배치 특징을 소개하고자 이번 특별전은 대문 양쪽에다가 금강역사 한 쌍과 시자 한 쌍을 각각 세워놓았다.
금강역사는 간단히 말하면 문신門神이다. 이것이 무덤으로 가면 진묘수鎭墓獸가 된다. 문은 대체로 한 쌍이라, 그래서 흔히 이런 문을 대궐에는 쌍궐雙闕이라 하거니와, 그런 까닭에 문신인 금강역사는 언제나 예외없이 한 쌍이라, 문 양쪽에서 한 대 쥐어박을 듯한 모습으로 꼬나본다.
그에 견주어 시자는 공손한 모양새다.
뭐 이것이 조선시대 무덤으로 가면 문인상 무인상 비스무리하게 된다.
자, 사찰 문을 들어섰으로, 이제 나한전으로 가 보자.
흥국사가 보유한 성보문화재 중에서 나한상은 어떤 특장이 있을까? 이를 위해 우선 한국 사찰에서는 거개 빠지지 않는 나한을 모신 전각을 알아봐야 한다. 그것을 이번 특별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흥국사興國寺 응진당應眞堂
나한을 모신 응진전應眞殿은 보통 사찰 중심에 배치되는 주불전에서 떨어진 위치에 자리하며, 건물 외관도 주불전에 비해 격이 낮은 맞배지붕 형태인 경우가 많다. 흥국사 응진당 역시 대웅전 뒤편 언덕 위에 자리한다. 가람 가장 깊숙한 곳에 팔상전과 함께 따로 영역을 이룬다.
응진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 건물로 경내 다른 건물들과 비교해 큰 편은 아니다. 응진당이 정확히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늦어도 응진당에 봉안된 십육나한도가 그려진 1723년 이전에는 건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진리를 깨달아 중생을 이끌다
나한을 모신 전각을 이처럼 응진당 혹은 응진전이라 하거니와, 흥국사에도 나한을 모신 전각이 있다. 그 특징을 앞과 같이 정리한 것이다.
이 응진당은 나한만 덜렁 봉안하지는 아니한다. 나한은 부처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응진당은 나한이 주인공이어야 하지만, 그들이 시봉하는 부처를 중앙 북쪽 단 위에다가 배치한다.
그 전체적인 배치 양상은 다음과 같다.
위 그림에서 보듯이 응진당은 나한상이라는 조각으로도 부족하다 생각했음인지, 벽면에다가 나한 그림들을 걸어놓았다. 다음은 그 내부 배치상 중 주불상과 나한상에 대한 총괄 설명이다.
흥국사 응진당 석가여래삼존상 및 십육나한상
興國寺 應眞堂 釋迦如來三尊像 十六羅漢像
Sakyamuni Buddha Triad and Arhats of Heungguksa Temple
조선 1655, 여수 흥국사
Joseon Dynasty, 1655 Heungeuksa Temple
흥국사 응진당 석가여래삼존상과 나한상은 1655년에 인균과 차조각승 삼인三忍, 그리고 9명의 보조 조각승이 참여해 조성했다. 인균은 1624년 수화승 응원應元을 도와 보조 조각승으로 <순천 송광사 응진당 십육나한상> 조성에 참여했으며, 1633년에는 〈김제 귀신사 영산전 십육나한상>을 제작했다.
인균 나한상은 사실적이면서도 양감이 풍부한 편이지만, 흥국사 십육나한상의 세부표현은 다소 도식화한 경향이 보인다. 나한은 모두 바위를 대좌로 삼아 정면을 바라보고 앉아 다양한 자세를 취한다.
저 세 분 중 가운데 계신 분이 절대지존, 천상전하 유아독존 오야붕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부처와 보살을 구분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머리카락 꼬불꼬불 파머하신 분이 부처요, 보관이라 해서 무거분 치렁치렁 모자 보관을 쓰신 분들이 보살이다.
부처와 보살은 천양지차라, 번갯불과 반딧불 차이라, 저리 세 분을 함께 표현할 때 삼존(三尊)이라 하지만, 아주 오도한 설명이다. 어찌 보살이 부처와 맞먹는단 말인가? 저 양쪽에 위치한 보살은 제화갈라보살과 미륵보살이어니와, 가운데 부처를 가장 크게 표현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부처 양쪽 옆에서 부처를 시봉하는 보살을 협시보살俠侍普薩이라 하거니와, 왼편을 좌협시, 오른쪽을 우협시보살이라 한다. 오른쪽과 왼쪽 기준은 가운데 부처이지, 결코 쳐다보는 사람 기준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 또 유념 바란다. 바라보는 이 기준, 그러니깐 화면 기준 왼편이 제화갈라, 오른편이 미륵이다. (2편에서 계속)
'문화재현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창읍성 벚꽃을 본 기억 더듬으며 (0) | 2019.04.14 |
---|---|
Jungmyeongjeon Hall Area of Deoksugung Palace(덕수궁 중명전) (0) | 2019.04.14 |
Monument to Garibaldi of Bologna(볼로냐에서 만난 가리발디) (0) | 2019.04.10 |
Etruscan Bronze Mirror "patera cospiana" (0) | 2019.04.09 |
이끼 홀라당 벗긴 보문리사지 당간지주 보며 문화재 보존과학을 생각한다 (5) | 2019.04.0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