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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Reading of History and Histories

여자들이 반대해 무산된 일부다처제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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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과 그의 정비 신혜왕후(神惠王后) 유씨(柳氏)를 합장한 현릉. 경기 개풍군 중서면 곡평리. 그에겐 정식부인은 오직 이 한 명뿐이다. 오세윤 제공
 

 

한국처럼 강고하면서 억압적인 신분제 나는 유사 이래 본 적이 없다.

 

능력이 아니라 피로써 그 사람 생평을 절단낸 가족제도로 한국사만큼 엄혹한 데가 없다.


능력에 따른 제도 개혁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강고한 일부일처제를 혁파해야 했다.

 

하지만 한국사에서 일부일처제를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모든 신분 문제는 일부일처제에서 비롯한다.


한데 내가 알기로 이 일부일처제를 법적으로 폐기하고자 한 심각한 움직임이 전근대에 딱 한번 있었다.
고려시대 원간섭기였다.


이를 당시 힘께나 쓰는 어떤 관료가 원나라 제도 관습을 들어 그 혁파를 과감히 주창하고 나섰다.
누가 반대했겠는가?

 

당시 재상 마누라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났다.

 

정식 부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첩하고 내가 동급이라니?


이를 전하는 기록을 보면 당시 재상들이 마누라를 두려워해 이 논의를 패대기쳤다고 했다.

 

여성 인권 해방은 지금은 의아하겠지만 일부다처제 도입이 첩경이었다.


몇몇 정경부인 농간에 천만 여성이 울었다.

 

나는 아래에서 말하는 일부일처제 혁파 움직임이 실행되었더라면 한국 역사가 달라졌으리라 본다. 
 
 

왕건상. 개성 발굴품이다


 

고려사절요 제19권 충렬왕忠烈王 一 을해 원년(1275), 송 효공황제孝恭皇帝 덕우德祐 원년·원 지원 12년 


○ 2월에 태부경 박유朴楡가 상소하기를, “우리나라에는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데 높은이나 낮은이가 한 아내만 둘 수 있어서, 아들이 없는 사람도 감히 첩을 두지 못합니다. 그러나 다른 나라 사람이 와서 아내를 얻는데는 제한이 없으니, 신은 인물이 모두 장차 북쪽으로 흘러나갈까 두렵습니다.

 

가령 신하들에게 첩 두는 것을 허락하되 관품에 따라 그 수효를 감하여 서인庶人에 이르러서는 일처일첩一妻一妾을 얻을 수 있도록 하며, 그 서처庶妻 소생의 아들도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을 모두 적자와 같이 하게 한다면, 짝이 없어 원망하는 남녀가 없어지고 인물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아 인구가 점점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유가 일찍이 말하기를, “동방은 오행五行으로 볼 때 목木에 속하는데, 목의 생수生數는 3이요 성수成數는 8이다. 기수奇數는 양陽이요, 우수偶數는 음陰이니, 우리나라의 인물이 남자가 적고 여자가 많은 것은 이수理數가 그러한 것이다.” 하였는데, 마침내 이런 상소를 하니, 부녀자들이 듣고 모두 원망하며 두려워하였다.

 

이때 재상 가운데 아내를 무서워하는 자가 있어 그 의논을 중지시켜 실행하지 못하였다.

 

○二月,大府卿朴楡,上疏曰,我國,男少女多,而尊卑,止於一妻,其無子者,亦不敢畜妾,異國人,來,娶妻,無定限,臣,恐人物皆將北流,令臣僚,許娵庶妻,隨品降殺其數,至於庶人,得娵一妻,一妾,其庶妻所生之子,得仕于朝,皆比適子,怨曠以消,人物不流,戶口日增矣,楡,嘗言,東方,屬木,木之生數,三,而成數,八,奇者,陽也,偶者,陰也,吾邦之人,男寡女衆理數然也,遂上此疏,婦女聞者,咸怨且懼,時,宰相,有畏其妻者,寢其議不行。

 

앞 박유의 언급 중에서 주목할 대목이 "그 서처庶妻 소생 아들도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을 모두 적자와 같이 하게 한다면, 짝이 없어 원망하는 남녀가 없어지고 인물이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아 인구가 점점 증가하게 될 것”이라는 구절이다. 명목상 박유는 일처일첩一妻一妾을 주장해서, 여전히 강고한 일부일처제를 외견상 유지하려 했지만, 첩 소생 자식들에 대한 차별 철폐를 주장했으니, 이는 실상 일부다처제였다. 

이는 결국 일부다처제가 우리의 상식과는 정반대로 차별철폐 차원에서 강구된 것임을 엿보인다. 

#처첩제 #적서차별 #일부다처제 

 

https://www.youtube.com/watch?v=hqYHvL7gl3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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