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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 Reading of History and Histories

유배는 자비유학이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18.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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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men in Plymouth, England, parting from their lovers who are about to be transported to Botany Bay, 1792

 

 

유배 생활엔 돈이 엄청 나게 든다.


관에서 무상으로 집 임대하거나 먹을 것 대주는 일 따위 않는다.


유배는 자비 유학이다.


그렇다면 다산은 무슨 돈으로 18년간이나 강진에서 생활한 거임?

 

첫째, 원래 부자다.


둘째, 큰아들 정학연이가 무허가 의사하면서 댔다.


셋째, 고액 과외 수업을 했다.


나는 세번째로 본다.


다산이 처음 강진 촌구석에 내려갔을 적에 어떻게 학생들을 모았을까?


서울대 출신 하버드 박사 기재부 과장 출신 이렇게 뻥을 쳤다고 본다.


입소문 났겠지.


족집게 선생 왔다고.


그 소문 진원지는 주막 여인이었을 것이다. (2016. 1. 30)

 

 

***

 

 

심각성을 담보하는 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에다가 당시 아래와 같은 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최성환 선생의 주목할 만한 논급이 있었다. 

 

자비로 사는 사람이 대부분이지만, 원칙은 유배지 관아에서 유배인에 대한 보수주인을 선정하여 그 사람의 집이나 소유건물에 거처하게 합니다. 보수주인이 유배인을 공양합니다.

 

그러나 관아에서 댓가 지불이 안지켜지고 유배지 주민들의 부담만 커지죠. 그래서 제발 유배인 좀 그만 보내거나 옮겨달라고 청원하는 문서들이 남아있습니다. 

 

물론 돈 있는 양반들은 따로 집이나 노비를 사기도 하고, 음식도 사람을 사서 공급받기도 합니다.

 

유배지에서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주변에서 지인들이 돈을 보내오거나 관할지 군수가 사적으로 도와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운양 김윤식 같은 경우는 유배지에서 소금 무역을 해서 돈을 벌어 유배지 비용을 충당하기도 합니다.

 

시대나 장소 유배인, 죄목에 따라 사는 방식은 정말 다양합니다.

유배인이 남긴 일기를 보면 누가 뭐(음식, 고기, 돈 등)를 보내줬다는 기록이 많이 나옵니다. 나중에 보답하려면 잘 기록해 둬야 했겠죠. 물론 사람에 따라 다릅니다.

 

정약전은 우이도로 유배되었을 당시는 집에 돈이 좀 있어서 두둑히 챙겨왔어요. 그런데 성격이 워낙 호탕하여 쓸데없는 데 돈을 많이 소비하고, 약전에 우이도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아내가 아들 혼례를 치뤘는데 남부럽지 않게 하려고 좀 무리하게 하다보니, 정작 유배지 남편에게 보낼 돈이 떨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이도에서 대흑산도로 옮기고 거기서 서당훈장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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