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엿장수가 신고한 대곡리 청동국보 유물>
광주박물관 27일부터 특별전
2007.11.26 15:29:03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1971년 12월20일, 당시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유전 학예연구사(65.현 토지박물관장)는 전라남도 문화공보실로 내려가라는 출장 지시를 받는다.
이 출장은 당시 국립박물관 윤무병 고고과장이 문화재연구소에 요청한 것이다.
청동기 유물이 무더기로 신고돼 전남도청 문화공보실에서 보관 중이니 그것을 직접 조사해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현지에 내려간 조 학예사는 유물들을 보고 경악하고 말았다.
청동칼인 동검이 3점에다가 8개 방울을 단 청동 팔주령이 2점, 아령 모양 방울 두 개를 마주 단 청동 쌍두령이 2점이나 됐다. 뿐만 아니었다.
청동 새기개(새김질을 하는 데 쓰는 연장)와 청동도끼 각 1점과 함께 잔무늬거울(다뉴세문경)도 2점이나 포함돼 있었다.
모두 11점인 이 유물들이 진품이라면 당장 국보감이었다. 실제 이 유물들은 진품으로 판정돼 이듬해인 1972년 3월2일 국보 제143호로 일괄 지정됐다.
도대체 이토록 훌륭한 유물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이 과정을 추적해 가던 조 학예사는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엿장수가 자발적으로 전남도청으로 들고와 신고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엿장수를 상대로 탐문한 조 학예사는 그것이 화순 대곡리라는 마을의 한 노인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그렇게 해서 신고 나흘 뒤인 1971년 12월24일 조 학예사는 엿장수를 대동하고 대곡리 현장으로 내달았다.
이 청동 유물들을 엿장수에게 넘긴 사람은 당시 67세 노인인 이 마을 '구재천 영감님'으로 밝혀졌다. 조 학예사가 구씨 노인에게 출처를 물으니 바로 그의 집 근처였다.
노인에 의하면 얼마 전에 낙수를 빼내기 위한 공사를 집 주변에서 하다가 돌무지를 발견하고는 그 것을 캐내다가 그 안에서 이 청동유물들을 발견해 보관하다가 엿장수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그의 말대로 그 근처에는 구 노인이 캐낸 무수한 돌무지가 널려있었다.
나아가 구덩이를 보니 목관 흔적까지 바닥에서 드러났다. 조 학예사는 즉시 발굴에 착수해 하루만에 수습조사를 끝냈다.
이처럼 출토지가 분명하고 그 발견 신고 과정이 드라마틱하기만 한 화순 대곡리 국보유물을 위한 자리가 그 소장처인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에 마련된다.
박물관은 기원전 4-3세기 유물로 평가되는 이 청동 유물들을 27일부터 내년 3월2일까지 특별 전시한다.
***
이후 이 화순대곡리유적은 재발굴이 이뤄지게 된다.
2008.02.20 10:36:04
<엿장수가 신고한 화순 대곡리 유적 재발굴>
국보 143호 일괄 청동유물 출토지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국보 143호로 지정된 화순 대곡리 유적 출토 청동유물 일괄품은 청동칼인 동검 3점과 8개 방울을 단 청동팔주령 2점, 아령 모양 방울 두 개를 마주 단 청동쌍두령 2점, 청동 새기개(새김질을 하는 데 쓰는 연장)와 청동도끼 각 1점, 그리고 잔무늬거울(다뉴세문경) 2점으로 구성된다.
이 유물들은 1971년 12월에 대곡리 마을 주민 구재천 씨가 자기집의 빗물 배수로 공사를 하다 돌무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치우는 과정에서 수습한 것이다.
수습된 유물의 가치를 모른 구씨는 마침 마을을 찾아온 엿장수에게 넘겼고, 이 엿장수는 이를 다시 전남도청에 넘김으로써 놀라운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공개됐다.
당시 전남도청 신고를 받은 국립문화재연구소는 나중에 이 기관의 수장을 역임하게 되는 조유전 학예연구사(현 토지박물관장)를 현장에 급파해 긴급 수습조사를 벌였다.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이 36년만에 이 유적을 다시 발굴하고 20일 그 현장을 공개했다.
지난 13일부터 시작된 이번 조사는 무덤구조를 확인하기 위한 것으로 21일 끝난다.
재발굴에서는 이렇다 할 만한 유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 재조사를 통해 대곡리 유적은 그 구조를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게 되었다고 조현종 관장은 밝혔다.
유적 현장은 버려진 창고와 함께 시멘트 도로가 덮고있었으며 그 주변은 쓰레기장으로 변해 있었다.
조사 결과 이 폐창고는 암반층을 파내고 축조되는 바람에 유적 지형을 심하게 훼손시킨 것으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이번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대곡리 고분은 그 축조 방법을 엿볼 수 있는 면모를 비교적 많이 노출했다.
매장시설은 풍화한 암반층을 파내고 마련했다. 묘광(墓壙)은 상하 2단으로 파내는 방식으로 조성한 것으로 밝혀졌다.
상층 1단은 동-서 330㎝, 남-북 280㎝의 평면 방형에 가까웠으며, 깊이는 동쪽 기준 85㎝ 가량이었다.
그 안에는 또 하나의 좁은 묘광이 발견됐다. 규모는 동-서 230㎝, 남-북 105㎝, 깊이 65㎝인 평면 장방형이었다.
묘광 바닥면에서는 목관 바닥면 흔적이 관찰됐다.
그 범위는 동-서 115㎝, 남-북 40㎝ 안팎이었으며 서쪽 끝부분에서도 일부 목관 흔적이 드러났다.
목관을 놓았던 외곽 중 북쪽에서는 25㎝ 내외의 깬돌을 1열로 쌓았음이 밝혀졌다. 이들 채움돌과 목관 사이에는 두께 10㎝ 안팎의 회백색 점토가 발견됐다.
학계에서는 대곡리 고분이 축조된 시기를 기원전 4-3세기 무렵으로 간주한다. 청동기시대가 종말을 고하고 초기 철기시대가 개막하는 무렵에 형성된 유적으로 보는 것이다.
조현종 관장은 "새로운 유적을 조사하는 것만큼이나 기존에 조사한 유적을 다시 조사하는 일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2008.02.28 10:57:27
대곡리 유적서 청동검 2점 추가 출토
광주박물관 36년만의 재조사 개가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국보 143호로 일괄 지정된 청동유물을 무더기로 쏟아낸 전남 화순군 대곡리 유적에서 36년만에 청동검 2자루를 추가로 발굴됐다.
국립광주박물관(관장 조현종)은 지난 13일 이후 화순군 도곡면 대곡리 312번지에 소재하는 기원전 4-3세기 무렵 통나무 목관묘 유적을 재조사한 결과 세형동검(좁은놋단검) 2자루를 수습했다고 28일 밝혔다.
동검은 길이가 각각 32.4㎝와 31.3㎝로 통나무 목관과 묘광(墓壙) 사이에서 확인됐다.
조현종 관장은 "이번에 확인된 동검 2점은 통나무관을 안치하고 그 바깥에 부장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를 통해 당시 매장의례 또는 매장풍습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대곡리 유적에서 1971년 12월에 수습된 청동유물에는 이런 동검이 3자루 포함돼 있어 출토 청동검은 모두 5자루로 늘었다.
나아가 이 동검 양면에는 흑칠(黑漆)을 한 목질 흔적이 남아있어 나무검집(칼집)에 넣어 부장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세형동검 중 이와 같은 칠편(漆片)이 확인된 유적으로 가장 이른 시기에 속하는 곳으로는 충남 아산 남성리 유적이 있으며 화순 대곡리 유적은 그 직후에 속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박물관은 말했다.
대곡리 유적보다 늦은 시기 유적으로는 전남 함평 초포리 유적이 꼽힌다.
대곡리 유적 출토 청동유물은 동검 이외에 청동 팔주령 2점, 청동 쌍두령 2점, 청동 새기개와 청동도끼 각 1점, 그리고 잔무늬거울(다뉴세문경) 2점으로 구성된다.
이 유물들은 1971년 12월 대곡리 마을 주민 구재천 씨가 자기집의 빗물 배수로 공사를 하다 돌무지를 발견하고 그것을 치우는 과정에서 수습했다.
구씨는 이를 엿장수에게 넘겼고, 엿장수는 다시 이를 관계 당국에 신고함으로써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유전 학예연구사(현 토지박물관장)가 현지에 급파돼 긴급 수습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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