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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와 함께한 나날들

김천에서 찾은 목개목관묘木蓋木棺墓(2005)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0.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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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내 고향 김천에서 저와 같은 형태의 초기철기시대 무덤이 발견됐다는 2005년 보도다.

당연히 발굴보고서가 나왔을 테지만, 내가 그걸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으니, 당시 그와 같은 일이 있었다고 적기摘記만 해 둔다.

아래 중요한 인터뷰이로 등장하는 김구군 선생은 이후 저 기관을 나와 삼한문화재연구원인가를 차렸으며, 이한상 교수는 동양대에서 적을 파서 대전대로 이동해 현재 그곳에서 재직 중이다. 

목개목관묘木蓋木棺墓라는 말은 간단히 말해 나무로 짠 널에다가 나무 덮개를 씌웠다는 뜻이거니와, 보나마나 일본에서 수입했을 그 용어가 주는 생경함에서 유별나게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암것도 아니다.

나무널에 나무덮개를 쓰는 일은 당연하다. 다만, 저를 명확히 보여주는 증거 포착이 쉽지 않았다는 사실은 기억해도 좋다.

암튼 저와 같은 발굴소식이 있었음을 기억해두자는 차원에서 15년 전 내 기사를 전개한다. 

*** 경북문화재연구원을 검색해 보니 저 발굴보고는 《김천 문당동유적》이라는 이름으로 2008년 정식 발굴보고서가 간행되었다. 그 조사성과를 아래와 같이 요약한다. 

이번 조사에서는 청동기세대 후기의 목관묘 1기를 포함하여 고려말~근대에 걸쳐 조영된 다양한 분묘 390기와 여막터 등 11기를 합하여 모두 402기가 발굴되었다.  

유물은 청자대접ㆍ회청자대접ㆍ백자업시 등 토도류 160점, 청동함ㆍ청동숟가락ㆍ상평통보ㆍ철제가위 등 금속류 166점, 옥ㆍ벼루 등의 옥석류 167점으로 모두 493점이 출토되었다.

이번 조사 성과는 김천지역에서 요녕식동검문화가 출토된 목개목관묘가 확인되어 대전 괴정동유적과 전라남도 지석묘 등지에서 출토되는 동검과 옥류의 공반관계 등을 비교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를 확보하였다. 그리고 조사지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려~조선시대 분묘에서 다양한 내부구조가 확인되어 당시의 장제를 이해하는데 유용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김천에서 찾은 초기철기시대 목관묘. 사진에서 포착하는 장면을 보면 탄화한 나무널판지가 양측면으로 널러부러져 있음을 엿보거니와, 이는 목관 덮개로 쓴 것이 나중에 양쪽으로 휩쓸려 내리면서 빚어진 현상이라는 것이 조사단 판단이다. 저 시대 목관묘는 무수하게 발견됐지만, 저처럼 목관 흔적이 잘 남은 경우는 드물다. 

 

 

2005.12.16 12:17:57
最古 나무덮개 쓴 목관묘 김천서 발굴
BC 2-3세기 무렵, 한국식동검문화 계승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기원전 2~3세기 무렵 초기철기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생각되는 국내 최고(最古)의 '나무 덮개를 쓴 나무널 무덤'(목개목관묘<木蓋木棺墓>)이 경북 김천에서 발굴됐다.

경북문화재연구원(원장 박영복)은 2006년 전국체전 개최를 위해 김천시가 테니스장과 롤러스케이트장, 수영장 등의 체육시설 건설을 추진하는 문당동 266-1번지 일대를 지난 7월 이후 발굴조사한 결과 고려말-조선시대 분묘 383여 기와 함께 문제의 목개목관묘 1기를 찾아냈다고 16일 말했다.

조사가 진행 중인 이 목개목관묘는 해발 98.6m인 구릉 능선 동사면(해발 94.5m)에 위치하며 묘광(墓壙) 규모가 길이 220㎝, 너비 75㎝, 최대 잔존 깊이 40㎝이다.

묘광과 목관 사이에는 불에 탄 나무널 덮개가 바닥까지 함몰된 상태로 확인됐다.

 

 

김천 초기철기시대 목관묘 출토유물

 

 

책임조사원인 김구군 실장은 "이로 볼 때 목관이 안치된 묘광 내부는 나무 덮개가 내려앉기 전까지는 빈 공간으로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목관은 덮개가 함몰된 이후 묘광과 목관 사이에 채운 함몰토의 압력에 의해 안쪽으로 밀려 있다. 목관은 바닥에서 상부 5-10㎝ 높이에서 회백색니질점토로 잔존하는 모습으로 확인됐다.

현재 확인되는 목관은 두께는 1㎝ 안팎이며 길이 200㎝, 너비 25-40㎝ 정도로 나타났다.


출토유물로는 흑도장경호(검은빛이 도는 목이 긴 항아리), 주머니호, 천하석제 소옥(小玉) 100여 점, 자루 갖춤 돌칼을 비롯한 석기류 3점이 확인됐다.

출토 위치를 볼 때 흑도장경호와 주머니호는 머리쪽 서단벽에서 80㎝ 떨어져 북장벽에 인접한 지점 바닥에서 10-15㎝ 정도 뜬 상태로 확인됐다.

이는 나무널 덮개를 덮은 상부 봉토에 부장되었다가 덮개가 함몰하면서 떨어졌음을 보여준다고 김 실장은 덧붙였다.


돌칼을 비롯한 석기류는 남서쪽 단벽 모서리 아래 탄화된 나무 덮개 위에 얹혀서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덮개 바로 위에 부장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천하석제 소옥은 서단벽 아래 목관이 썩은 흔적 부분인 회백색니질점토에서 발견됐다. 나아가 이들 구슬은 실에 꿰어진 채로 촘촘히 연결된 상태에서 마치 꽈리와 같은 모양으로 발견됐다. 이 구슬 꾸러미 역시 목관 상부에 부장했음이 확실해졌다.

이런 점들을 통해 기존에 제대로 알 수 없던 유물 부장 양상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고 김 실장은 말했다.

나아가 이 목개목관묘는 유물 부장 양상을 통해 이른바 한국식 동검문화를 계승한 것으로 밝혀졌다.

김구군 실장은 "이번 김천 목관묘는 지금까지 확인된 초기철기시대 목개목관묘 가운데 연대가 가장 오래됐으며, 특히 덮개 흔적이 잘 남아있어 당시의 매장습속과 구조를 밝히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평가했다.

출토유물 중 천하석제 소옥은 대전 괴정동 유적 등지에서 출토되고 있고, 나아가 이런 유물은 전남지역 지석묘 발굴조사 성과와도 연결되고 있다.

김천에서 확인된 이와 같은 목관묘는 1996년 영남문화재연구원이 아파트 건설 과정에서 조사한 대구 팔달동 유적에서 10기 가량 확인됐으나, 나무 덮개가 있을 것으로 추정만 되었을 뿐, 그 실물이 확인되지 않았다.

더구나 축조 연대 또한 이번 김천 목관묘가 팔달동 유적보다 빠른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고 동양대 이한상 교수는 말했다.>)이 경북 김천에서 발굴됐다.


김천에서 확인된 이와 같은 목관묘는 1996년 영남문화재연구원이 아파트 건설 과정에서 조사한 대구 팔달동 유적에서 10기가량 확인됐으나, 나무 덮개가 있을 것으로 추정만 되었을 뿐, 그 실물이 확인되지 않았다.

더구나 축조 연대  또한  이번 김천 목관묘가 팔달동 유적보다 빠른 것은 거의 확실해 보인다고 동양대 이한상 교수는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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