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안태安胎 전통[2] 모든 왕이 전국 각지에 만든 태실
앞서 살폈듯이 고려는 태조 왕건 이래 각 왕이 전국을 뒤져 길지吉地라 할 만한 데를 골라 탯줄을 보관하는 태실胎室을 만들었거니와
이 태실을 어찌 관리했는지 엿보게 하는 장면 두어 개가 있으니 간단히 정리하면
종묘
딱 이거였다.
저에서도 역시 왕건의 그것은 남상과 같은 위치를 차지해서, 그 태실은 건국시조라 해서 관에서 상시 관리했으며, 때마다 제례를 봉행했을 것임은 불문해도 가지하거니와 그런 까닭에 나는 고려왕조가 왕건을 기억하는 방식 중 하나로 저 태실을 거론했으니
저 왕건 태실이 지닌 중대성은 여러 가지어니와 무엇보다
김유신과 왕건을 연결하는 물경 300년에 달하는 미싱링크를 단숨에 해결하는 까닭이다.
신라시대 태실로는 오직 595년생 김유신이 알려졌을 뿐이어니와, 기록 망실 혹은 부실로 왕건에 이르는 300년간이 적어도 태실 문화에서는 공백을 넘어 암흑이다.
왜 왕건 태실이 중요한가? 늘 말하듯이 왕건은 신라사람이다.
왕건은 신라新羅 헌강왕憲康王 3년, 877년 태어났으니, 그는 신라 사람으로 태어나 신라사람으로 죽었다.
그가 태어나 태실을 만들었다 함은 그가 태어난 그 시절, 곧 통일신라말에는 그런 일이 적어도 있는 집안에서는 이런 일이 일반이었음을 말해주거니와,
그런 그가 새로운 왕조를 개창하고 대대적인 태실을 조성했다 함은, 그 이전 신라 왕실에도 똑같은 일을 했다는 방증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태항아리 전통은 연원을 보면 동시대 중원 중심 중국 대륙에서는 보이지 않고 오직 장강 유역 남부에서만 성행하는데, 이 점을 도대체 어찌 해명할 것인가 하는 문제도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다.
왕건이 구한 것은 실은 김유신 태실이다.
너무나 우뚝했지만, 너무나 고립이었기에 그 선후를 알 수 없이 느닷없이 출현한 김유신 태실, 그것이 맥락이 있음을 만천하에 폭로한 것이 왕건 태실이다.
왕건 태실은 그것이 탑재한 폭발성은 동아시아 문화사에서는 원폭급이다.
이를 통해 지진구地鎭具 진단구鎭壇具 혹은 골호骨壺라는 해석만 무수한 고고학적 증거물들이 추풍낙엽으로 쓰러질 수도 있다.
그 참상은 이미 익산에서 만천하에 그 마각을 드러냈으니
함에도 단 한 놈도 아직 항복 선언이 없다.
헛소리만 찍찍 해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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