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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 이모저모

고려시대 안태安胎 전통[2] 모든 왕이 전국 각지에 만든 태실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4.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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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항아리



태조 왕건이 태실을 조성했으므로, 이후 왕들 역시 자동빵으로 적절한 데를 골라 태실을 만들었을 것임은 불문해도 가지하다.

다만 그런 흔적이 몇 남지 않았다는 것이 문제이기는 하지만, 그런 대로 그런 편린이 있으니

고려사 지리2 경상도 안동부 기양현을 보면 명종明宗 2년(1172)에 태자의 태胎를 묻어 지금 이름으로 고치고, 승격시켜 현령관縣令官으로 삼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 태실이 개성에서 아주 먼 안동에 만들었음을 보며 

같은 지리地理1 양광도 안남도호부 수주 김포현金浦縣을 보면 신종神宗 원년(1198)에 왕의 태胎를 이곳에 묻게 되어 김포현으로 승격했다 해서 같은 양상을 보이며 

같은 지리3 서해도 평주 동주에는 이곳을 원종元宗(재위 1259~1274)이다. 시대에 왕의 태를 묻은 곳이라 해서 서흥현령관瑞興縣令官으로 승격케 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같은 양상을 보인다.

또 고려사 세가 권 제28 충렬왕忠烈王 4년(1278) 윤11월 병자에 장군將軍 차신車信을 보내어 세자의 태胎를 안동부安東府에 묻었다고 하고, 동 지리2 경상도 안동부 흥주 조에서는 그래서 이곳을 흥령현령관興寧縣令官으로 고쳤다 하고 

지리1 양광도 원주에 이르기를 공민왕恭愍王 2년(1352)에 치악산雉岳山에 〈왕의〉 태를 안치하고 원주목原州牧으로 복구했다 하고, 

지리2 경상도 안동부 예안군 조에서는 우왕禑王 2년(1376)에 왕의 태가 묻힌 곳이라 하여 승격시켜 군郡이 되었다가, 얼마 후 승격시켜 주州가 되었다고 한다. 

같은 고려사 열전 권 제48 우왕禑王 9년  7월에는 왜구가 대구大丘·경산京山·선주善州·인동仁同·지례知禮·금산金山 등지를 침탈하자 안동부사安東府使 이충부李忠富한테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면서 “죽을 힘을 다해 방어하여 태실胎室을 보호하라”고 왕이 직접 한 것으로 보아 태실을 매우 중시했음을 본다. 





그런 까닭에 태실 관련 업무를 전담하는 공무원도 따로 뽑았으니 고려사 지志 권 제27 선거選擧1 과목1에 이르기를 지리업地理業 시험에는

『지경경地鏡經』 4권, 『구시결口示決』 4권, 『태장경胎藏經』 1권, 『가결謌決』 1권, 도합 10권을 읽어야 하는데, 문장을 해독하고 겸하여 뜻과 이치에 통한 것이 6궤가 되어야 하고, 문장을 해독하는 것은 4궤에 통해야 한다. 또한 『소씨서蕭氏書』 10권을 읽고 그 속의 문장을 해독하는 것은 1궤가 되어야 한다.”

고 해서 아예 시험 교재까지 규정함을 본다. 

이런 몇몇 편린으로 보아 고려는 역대 왕의 태실을 각각 만들었으며, 그 태실은 전국을 커버해서 길지라고 꼽힐 만한 데를 대상지로 골랐으며, 그것이 설치됐다는 이유만으로 해당 지방조직이 승격했음을 추찰한다.

이는 실상 조선왕조가 시행한 그 방식과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이는 곧 우리한테 익숙한 태실을 둘러싼 그 모든 조선의 전통은 고려시대를 그대로 계승한 것임을 본다.

나아가 이런 고려의 태실 조성은 당장 왕건 시대에 시작했으므로, 그것이 신라시대 유습이라는 사실도 이제는 우리는 안심하고 확정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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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안태安胎 전통[1] 태조 왕건의 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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