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수도 왕검성이 평양에 있었는지 어디에 있었는지 여기에 대해 논할 생각은 없고,
단지 사기 조선전에 하나 눈여겨 봐야 할 부분이 있어 쓴다.
天子爲兩將未有利, 乃使衛山因兵威徃諭右渠, 右渠請降遣太校勘 205子獻馬. 人衆万餘持兵方渡浿水, 使者及左將軍疑其爲變謂太子, ‘已服冝毋持兵.’ 太子亦疑使者詐之遂不渡浿水復引歸. 報天子誅山. 左將軍破浿水上軍, 迺前至城下圍其西北. 樓舡亦徃㑹居城南. 右渠堅守數月未能下. (좌장군이 浿水에서 군사를 격파하고 전진하여 [王險]城 아래 이르러 서북쪽을 포위했다. 樓船[軍] 또한 [거기로) 가서 합세하고는 성 남쪽에 주둔하였다. 우거가 끝내 성을 굳게 지키므로 몇 달이 되어도 함락할 수 없었다.)
전쟁 마지막 왕검성을 포위할 때 이르러 한나라 병사들은 성의 서북쪽과 남쪽을 포위하기 때문에 최소한 이 군대는 충분한 공지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대동강 북안이 됐건,
대동강 남안이 됐건, 아니, 대동강이 아니라 한반도 바깥이건 간에
왕검성의 서북쪽과 남쪽에는 반드시 한나라 병사가 주둔해 포위를 하고 있을 만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왕검성의 북쪽과 남쪽에는 바짝 붙어 강이 있으면 안 된다.
<보유> 일단 낙랑토성은 대동강이 북안에 너무 딱 붙어 있어 여기는 사기 조선전의 왕검성 자리는 아니라고 본다. 대동강 북안의 평양성 자리도 만약 여기 있었을 수는 있겠지만 지금처럼 대동강에 바짝 붙은 위치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 같다.
북한학계에서도 청암리 토성 등 대동강변에서 왕검성을 찾는데 어찌 보면 강과는 일정 정도 거리를 둔 지역에 있지 않았을까. 만약 대동강 남안이라면 낙랑토성이 아니라 도리어 대동강에서 좀 떨어진 지역일 수도 있겠다.
낙랑토성보다 더 남쪽 어딘가가 아닌가 한다는 뜻이다.
물론 이런 검토는 일단은 왕검성이 통설대로 평양에 있음을 전제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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