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三國史記》 권 제3 신라본기新羅本紀 제3 자비마립간慈悲麻立干 13년(470)에 이르기를
삼년산성을 쌓았다[築三年山城]
고 했거니와, 이에는 다음과 같은 자체 부연 설명이 있으니
삼년이라는 말은 이 공사를 시작해 마치기까지 3년이 걸렸으므로, 그리 이름한 것이다[三年者, 自興役始終三年訖功, 故名之]
묻는다. 이와 같은 삼년산성 축성 내력과 그에 따른 명명법은 왜 기록에 남았을까? 의문을 품어봤어야 답을 하든가 말든가 하지, 아무도 묻지 않았으므로, 문제의식도 없고, 그에서 빼낼 만한 것이라고는 매양 하는 말이
"신라가 소백산맥을 넘어 서북방으로 진출하는 데 있어 중요한 거점 성으로 기능하였다."
와 같은 언급에서 단 한 치 진보가 없다. 이와 같은 설명은 하나마나 한 것이니, 이딴걸 분석이랍시고 붙여놓은 삼국사기 주석본에 차마 눈을 뜰 수가 없다.
그렇다면 삼년산성은 왜 유독 그 축성내력과 작명법 내력이 남았던가?
유례없이 긴 공정을 소요한 건축물인 까닭이다. 단순히 쌓는 데 3년이 걸렸다 해서 삼년산성이라 한 것이 아니다.
성을 쌓는 데 삼년이 걸리지 않아야 하는데, 비정상적으로 삼년이나 걸렸으므로 삼년산성이라 한 것이다.
저와 같은 성은 단군조선 이래 순식간에 해치운다. 1년? 것도 너무 길다. 농번기 때문이다. 저런 성을 1년이나 주구장창 쌓으면 농사 지을 사람도 없고, 군 복무할 사람도 없다.
그런 까닭에 모든 성은 한두달만에 후다닥 해치워야 한다. 것도 농한기에 말이다. 주로 가을걷이가 끝난 겨울에 했다. 이때는 인력이 놀 때다. 이때 후다닥 해치워야지 뒤탈이 상대적으로 적다.
한데 그러해야 할 삼년산성이 어찌된 셈인지, 3년이나 걸렸다. 그래서 이것이 특기할 만하다 해서 기록에 남은 것이지 무에 다른 이유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왜 삼년산성은 완공에 3년이나 걸렸을까? 딱 보니 부실공사에서 말미암았다. 짓다 말고 무너지고 또 무너지고 반복해서 초대형 안전사고도 났다. 그래서 중단했다가 한 텀 건너띄고 다시 했는데 이번에는 비가 와서 무너졌던지 했다. 그래서 또 중단했다. 시공업체가 돈 떼 먹고 달아났을 수도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간접 증거가 있다. 완공시점에서 16년이 지난 소지마립간炤知麻立干 8년(486) 봄 1월에
이찬 실죽을 장군으로 삼고 일선 지역 장정 3천 명을 징발해 삼년과 굴산 두 성을 고쳐 쌓았다 拜伊湌實竹爲將軍. 徵一善界丁夫三千, 攺築三年·屈山二城.
맞자나? 삼년산성이 또 무너졌자나? 그리고 이때는 개축 시점이 봄 1월이라는 사실을 특기해야 한다. 이때는 봄농사 시작 직전이다. 그 징발인력이 3천 명에 달한다. 어마어마한 규모를 동원한 것이다. 개축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다시 쌓다시피 했을 것이다. 또 무너진 것이다.
삼년산성은 유례없이 긴 완공기간을 소요한 건축물이면서, 유례없이 많은 안전사고가 있었던 현장이다. 삼년산성이 차지하는 위치는 이 점에서 우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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