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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삥땅의 요람 광흥창과 군자감[兩倉]

by 세상의 모든 역사 2021. 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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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이름으로 남은 광흥창

 

광흥창廣興倉은 서강西江에 있는데 백관百官의 봉록 지급을 담당하고, 군자감軍資監은 용산에 있는데 금군禁軍과 조례皁隷의 급료 지급을 관장한다. 이것이 양창兩倉이고, 다 호조戶曹에 속한다.

조운漕運으로 물자가 모이는 곳인지라 아전들이 농간을 부리고 교활해서 폐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아 양창에서 벼슬한 자는 필경 포흠逋欠을 했다거나 감독을 잘못했다거나 해서 처벌을 받는다.

나는 을사년(1785, 정조)에 군자감 판관判官이 되었고 몇 년 뒤 호조가 나를 조사했지만 문서를 후임자에게 이관한 것이 분명하였으므로 다행히 무사했다.

경술년(1790)에 광흥창 주부主簿가 되고 계축년(1793) 가을에 호조가 또 나를 조사했는데, 앞뒤의 낭관郎官 10인이 의금부에 하옥되어 법에 따라 처벌되었지만 나는 재임한 넉 달 동안 포흠이 노란 콩 13섬에 불과하였고, 그것도 내가 이직한 뒤 담당 아전 무리들이 몰래 가승加升을 은닉하고 다시 보충하지 않은 것이어서 의금부가 용서하자는 의론을 올려 상이 윤허하였다. (370쪽) 

유득공柳得恭(1748~1807) 지음, 김윤조·김종태·김성애 옮김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 권4. 한국고전번역원, 2020, 12. 

***

 

조선시대 조운선. 광흥창 같은 데로 몰려 들어 물자를 부라놨다. 그걸 삥땅 쳤다. 


재정, 특히 문관과 무관 월급 지급을 담당한 데가 저 두 곳이었다. 저 중에서도 광흥창은 서강대교 북단에 지명으로 남았고 근자엔 문재인 대선캠프 일부가 저곳에다 사무실을 마련한 까닭에 그 출신들을 광흥창 멤버라 칭하기도 한다.

두 곳 모두 한강변에 위치한 까닭은 저곳이 바로 항구 나루가 있던 곳으로 각지에서 공납한 물자가 모이는 곳이었다.

당시는 화폐경제가 아니라 실물경제라 녹봉이 현물로 지급됐다. 간단히 말해 쌀과 같은 곡식으로 월급을 받아갔다.

그런 각종 물자가 모이는 곳이니 얼마나 많은 부정부패가 있었겠는가? 졸라 삥땅 쳤다. 저짝에서 일하는 아전들만 삥땅 쳤겠는가? 다 농가쳐먹었다.

 

태안 앞바다에서 인양한 조선시대 조운선 마도4호선에서 출수한 분청사기. 삥땅치는 근간이었다. 



하도 삥땅을 쳐대니 그 상급관청 호조에서 틈날 때마다 털었으니 이것도 쉽지 않은게 다 짜고치는 고스톱이라 힘 있는 놈은 다 빠져나가고 잔챙이들만 재수없게 걸려들었다.

유득공? 깨끗한 것처럼 빙자했지만 난 믿지 않는다. 벌써 한번은 걸려들었다 자뻑하잖아? 비록 죄가 없다 둘러쳤지만 삥땅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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