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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SAYS & MISCELLANIES

요물과도 같은 돈 혹은 월급 이야기

by taeshik.kim 2023.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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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없이 자라며 학교를 다녔다 해서, 내가 거창한 계급투쟁의식이 있는 사람은 아니다. 어쩌면 체제 순응주의자라고도 할 만한데, 그 체제 안에서 내가 획득할 수 있는 최대치 정도만 적당히 먹고 살자 이런 주의에 나는 가깝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던 무렵만 해도, 요즘과는 사정이 많이 달라, 썩 만족은 하지 못한다 해도 그런 대로 이름 있는 대기업은 어느 정도 들어갈 만한 환경이었으니, 그럼에도 나는 개중에서도 나은 편이라는 영문과 출신이라 하지만 문과대라는 한계가 커서 취업 선택의 폭이 생각보다는 굉장히 좁았다. 

졸업을 앞둔 시점에 이곳저곳에서 날아드는 신입사원 모집 소식에 몇 군데는 날림으로 넣어 합격통지서를 받았지만, 대기업이라고 할 만하는 데는 딱 한 군데 지원했으니, 현대자동차였다. 내 기억에 이 현대차는 업종별로 모집을 따로 했는데 보니 영문과가 지원할 만한 데는 해외영업직밖에 없었다. 

원서를 내고 시험은 계동 현대사옥 강당에서 쳤다. 영어 듣기 시험이었는데, 시험 문제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사담 후세인 관련 내용이었다. cnn 방송분이었다.


본문과는 아무 관계없다. 허해서 넣을 뿐



개발소발 어찌저찌 해서 봤는데, 용케 합격했다는 소식이 이내 날아들었다. 그때 고민을 좀 했다. 현대차라는 대기업을 가서 해외영업을 뛰느냐? 아니면 다른 편한 데를 가느냐 하는 기로에 섰다. 

그때 나는 한국관광공사도 같이 합격한 터였는데, 결국 편하게 살자 해서 공사를 택했으니, 이것이 지금도 그쪽에 남은 동기들한테는 미안하나 찢어지게 가난한 나로서는 패착 중의 패착이었다.

월급이 형편없었다. 당시 최저임금이 20만원이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그땐 그런 회사가 거의 없었는데, 관광공사는 수습기간 3개월만 딱 20만원씩 월급을 넣어주는 게 아닌가?

그때 내 수중에 무슨 돈이 있겠는가? 죽는 줄 알았다. 그렇다고 수습기간이 끝나고 정식 사원이 되고서 첫 월급을 받아 봤는데 57만원이었던가로 기억한다.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거기 잠깐 다니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실은 뼈져리게 했다. 이런 회사는 있는 집안 자식들이 다닐 만한 데라고 말이다. 

엄밀히는 난 기자가 되고 싶어 회사를 그만 둔 것은 아니었다. 그런 것처럼 말했지만, 땡전 한 푼 없이 시작하는 마당에, 더구나 집에서 도움이라고는 쥐꼬리만큼도 기대할 수 없는 내가 붙어 있을 곳은 아니었다.

그래서 일단 때려치고 봤고, 그래서 어영부영하다가 기자나 되어볼까 해서 준비하다가 운 좋게 붙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당시 내가 기자가 봉급이 특별히 많은 직업이라는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깡촌 시골 출신인 나는 그런 데 정보가 하나도 없었다.

다만, 기자가 되고 나서 안 사실이지만, 당시 기자사회에 팽배한 말이 하후상박下厚上薄이란 말이라, 기자는 초봉은 여타 직업에 견주어 높지만 올라갈수록 개털된다, 이런 것이 있었는데 지나고 보니 진짜로 그렇더다.

그때 공무원 봉급은 박하기 짝이 없었다고 기억한다.  

그 전에도 그렇지만 내가 어느 일정 시점이 지나고서는 더더욱 내 연봉 얘기는 안했는데, 다른 대기업 들어간 친구들이 하는 말을 줏어들으니, 차장급 정도가 되었을 때 이미 그들 연봉은 내 두 배를 상회하고 있었다. 가뜩이나 이런 얘기는 하기 싫은 성정도 있지만 이때는 더 쪽팔려서 얘기를 못했다.

내가 놀란 것은 연합통신 기자로 입사하고서 수습 때 받아든 월급 봉투였다. 당시 우리 공장 기자 월급 수준이 언론계 아마 중간쯤 되지 않았나 하는데, 내가 관광공사에서 받던 본봉 월급의 몇 배였다. 것도 수습기간에. 

그때 나는 비로소 무슨 이런 개떡 같은 세상이 있나 했다. 저짝에서는 초창기 시절임을 고려해도 하루하루 버텨내기가 힘들었는데 이쪽에 오니 딴 세상이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해서 아주 많았다는 생각은 하지 마라. 하도 전 직장에서 돈 때문에 고생해서 상대적으로 더 그랬던 것일 뿐이니깐. 

이후 나는 기자 생활 만 31년을 꽉 채워가는 지금, 나는 기자가 되고서 어린 시절 이래 전 직장 초년까지 짓누른 가난이라는 기나긴 질곡에서는 비로소 해방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부자이겠는가? 

나한테 중요했던 것은 오직 하나다. 가난에서 비로소 해방되었다는 안도감 딱 하나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거대한 부를 꿈꾼 것은 아니다. 아니다, 그런 꿈은 꿨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를 향해 불나방처럼 뛰어든 것도 아니었으니, 말 그대로 그냥 그런 꿈은 있었다는 정도로 말해둔다. 

그래서 징글맞은 이 공장이 한편으로는 고마울 수밖에 없다. 이를 통해 내가 가난이라는 질곡에서 해방되었으니깐.

아니 엄밀히 말해 몇 대를 이어왔는지도 모르는 가난을 우리 가문이 비로소 내 대에 와서 벗어났으니깐 말이다. 


앞과 동일



돈에 대한 욕심? 글쎄 남들 눈에 어찌 보일지 모르나, 그에 환장할 정도로 얽매인 것은 아니었다고 본다. 돈? 많으면 좋겠지만, 나는 내 능력을 안다. 내 몫은 딱 요기까지다. 

다만 한 번 태어나 한 번 사는 이상, 저 질긴 가난이라는 굴레는 내 손으로 끝장내고 싶었다.

기왕 한 번 사는 인생, 그래 폼나게까지는 몰라도, 몇 푼 모으느라 허리띠 졸라매는 그런 인생은 더는 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해둔다. 

참, 돈 얘기 나왔으니 말인데 이 친구 참 요물 맞다.

참, 또 하나 잊어먹기 전에...싸구려 동정심이라 남들이 비난할지 몰라도, 힘겹게 사는 친구들이 그래서 나는 그렇게 보기가 안 좋다.

내 과거를 투영했다 해도 할 말 말이 없지만, 그런 친구들은 어케든 그 질곡에서 벗어나게끔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다 해서 내가 내밀었다는 손길, 별것도 없기는 하다는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달갑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아직 한 사람도 없더라.

그래서 이것도 오지랖이라 해서 이제는 나서지도 않는다. 어차피 지 인생 지가 사는데 내가 나선다 한들 오지랖밖에 더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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